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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징표!
작성자황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1 조회수1,359 추천수9 반대(0) 신고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의 <본질을 사는 인간>中
예수회/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누구를 찿고 있습니까?(요한 20,15)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한마디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불교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줄 수는 있으나 가슴 따스한 체험을 주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참선을 하고 명상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수행이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종교는 불교와 달리 위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마음 차분함이 아니라 마음 벅참을 선사해 준다. 그러기에 참으로 그리운 주님을 만나서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될 때 그 만남의 표현은 지극히 정감적일 수밖에 없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이라면, 그리스도교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만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는 시종일관 하느님을 찿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녔던 두 제자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자 예수께서는 뒤돌아보시며 "당신들은 무엇을 찿고 있소?( ti zetite, 요한 1, 38) 하고 물으신다. 이어서 베드로가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요한 1,45),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을 찿아 나선다.(요한 1, 45).  요한 복음의 또 다른 곳에서는 니고데모가 밤에 영생(永生)을 찿아서 예수님께 오고(요한 3, 1) 또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찿아 예수께 밀려든다(요한 6,24-26). 모두가 무엇인가를 찿아 예수께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찿는 동기가 달라진다. 예수님 시신(屍身)이 없어져서 서럽게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나타나 "누구를 찿고 있습니까?"(tina zeteis, 요한 20,15) 하고 묻는다. 요한복음은 우리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을 찿아서'가 아니라 '누구를 찿아서'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찿고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찿아서, 니고데모는 영생을 찿아서, 군중은 먹을 것을 찿아서 예수님께 왔다. 찿는 것은 제각기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를 찿아서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찿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평화를 찿아서, 하느님의 축복을 찿아서, 병고에서 치유되기 위해서, 하늘 나라를 찿아서... 하지만 우리가 정말 찿아 나서야 할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며, 그 누구는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신다면 그것은 사랑의 징표일 뿐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자녀들을 돌보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징표일 뿐이다. 이 사랑의 징표 앞에서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것은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주님이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옛 중국 시가 있다. "님이 내게 과일을 던지시길래 나는 하얀 옥으로 갚았지. 갚은 게 아니라 깊이 사랑하고저. 님이 내게 복숭아를 던지시길래  하얀 옥으로 갚았지. 갚은 게 아니라 길이 사랑하고저. 님이 내게 오얏을 던지시길래 검은 옥으로 갚았지. 갚은 게 아니라 길이 사랑하고저."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된다...!

 

† 찬미 예수님,
저도 주님을 애타게, 애타게 찿고 있습니다.^^ 그 분을 찿아가는 여정에 함께 하는 우리들은 서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그 분의 자녀들인지요. 오늘도 주님 사랑안에서 기쁘고 은혜로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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