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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2 조회수1,300 추천수9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12일 (목)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8,21-19,1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복음산책]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가르침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규범이다. 물론 이 규범의 참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 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나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내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수록된 공동체설교를 꿰뚫는 기본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연 겸손과 관심, 자비와 용서일 것이다. 이들 정신은 모두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특히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위해 지녀야 하는 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다. 겸손과 관심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요소이지만, 교만과 무관심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이다. 교만과 무관심은 즉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하는 공동체는 건설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잘 설명해 주셨다.(마태 18,12-14) 어느 공동체이든 완전한 공동체는 어느 곳에도 없다.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병들어 있는 공동체가 많다. 겸손이 있다 해도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되어 있고, 관심이 있다 해도 지나친 간섭과 시기와 질투로 상처투성이가 된 공동체가 많다는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여기에 듣는 약은 자비와 용서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마태 18,23-35)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만큼 용서하는 자는 용서받는 것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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