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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누구인가?
작성자임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2 조회수1,014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복음 : 490번의 용서

 

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우리의 삶은 용서 하는 것보다 용서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용서 받을 때는 애걸 복걸하여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고 반응하는 약자의 삶에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다.  

 

한국 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그리고 군대 같은 일방적 지시와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라  엄하게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즉, 수직적 사회 구조와 문화가 우리의 삶에 깔려있고, 이러한 문화와 가치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도 너무나 잘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약자의 삶에는 너무나 잘 적응되어 있어,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게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너무나 잘 안다.

 

다시말해서 약자로서의 삶에 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용서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용서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는 방법도 잘 모르고, 용서하는 멘트도 잘 못하고,

 

용서하는 타이밍도 잘 모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용서하는 자로서 용서에 대한 의식이 내면화 되어 있지 못하고

 

용서가 마치 대단한 일인것처럼만 보이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차는 그런 문화에서 살아왔고,

 

용서에 대한 교육, 용서와 관련된 의식의 내면화, 용서의 사회화가 잘 되어있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상 사회 생활에서 가진자, 힘있는자, 강자의 모습은

 

늘 처단하고, 평가하고, 처벌하고 큰 소리치는 모습만 주로 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 관계 속에서 그런 위치에 있을 때, 알게 모르게 우리도 처단하고,

 

평가하고, 처벌하고, 큰 소리 치는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하게되고, 또 주변에서 보게 된다.

 

이는 용서에 대한 우리의 사회화가 잘못 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용서받는 데는 사회화가 잘 되어 있지만, 용서하는 데에는 사회화가 잘 되어 있지 못하여

(살아온 이 사회에서 우리를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마치 청소년의 비행이나 일탈이 그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측면이 더 큰 것처럼),

 

용서하는 행위가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우리 크리스챤들이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크리스챤들이 용서의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크리스챤들이 일상 생활에서 가진 자, 힘 있는자, 강자의 모습이 되었을 때

 

처단하고, 평가하고, 큰 소리 치는 모습보다

 

겸손하고 자비로운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진정 자비로울 때, 우리는 진정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자비로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고, 첫단추이며, 모든 일의 단초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힘이 있는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자비로운 리더쉽을 발휘하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크리스쳔 정치인이 나온다면

 

처단하고, 평가하고, 처벌하고, 큰 소리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겸손하고 자비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언제나 자비로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와 관련된 크리스챤으로서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누구인가?

 

 답 = 나는 언제나 자비로운 크리스챤이다.)

 

눈뜨자마자 또 용서의 하루가 시작되는 구나?

 

또, 자비로운 크리스쳔으로서의 하루가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 눈 감으면 또, 용서의 하루가 지났구나,

 

자비로운 크리스챤으로서의 하루가 흘러 갔구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다가 일생을 마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미래이겠는가? 돌아온 작은 아들처럼... 

 

 

* 여기서, 자비로운 삶을 사는데 가장 좋은 방법 하나를 소개 하고자 한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하다.

 

1)자비로운 삶을 살 때가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식 할 것!

 

2)자비롭지 못한 삶을 살 때는 잃는 것이 더 크다는 사실을 늘 인식 할 것!

 

3)자비의 생활을 주변의 이웃에게(그가 누구든간에  모든 인간에게) 실행해보고 경험해 볼 것!

 

4)또, 이를 되풀이 함으로써 자비의 선순환, 그 체험이 주는 행복을 지속적으로 만끽해 볼 것!  

 

5)이런 아름다운 자비의 선순환을 늘 생각하고, 의식화하고, 계속 기억하고,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서"참으로 잘 살다왔다. 자비로운 나의 아들아!"

 

라는 말을 듣고 눈물 흘리고 칭찬받고 격려받는 장면을 늘 상상 할 것!  

 

 

 

 

2.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심이라는 말이다.

 

진심으로 우리가 용서 할 때 우리는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용서 하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한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하느님 아버지는 무조건 용서 할 것을 희망 하신다.

 

그래서 490번의 용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횟수에 상관없이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닥칠 용서할 꺼리에 대해서 항상 용서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진심으로"라는 말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진심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이웃에게 자비롭게 다가 갈 때

 

새로운 삶의 변화가 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라는 말은 양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적인 것이다. 질적인 변화, 즉, 삶의 관계가 질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적의와 차별과 미움의 관계가

 

친구와 평등과 사랑의 관계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관계없이

 

늘 진심으로 자비롭게 대할 때(다른 사람도 우리의 행동과 똑같이 자비롭게 행 하는 것을

 

보게 되는 하느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임),

 

그럼으로써 우리 이웃과의 모든 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축복된 관계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 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심과 용서를 만나게 될 것이고, 이를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하느님 아버자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늘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워라!

 

490번의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의 전문가, 자비의 전문가가 되어라! 

 

나 = 자비의 크리스챤!  잊지말자. 하느님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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