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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아무도 용서할 수 없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2 조회수1,357 추천수6 반대(0) 신고

복음: 마태 18,21-35

민족에 따라서 좋아하는 숫자와 싫어하는 숫자가 있다는 것은 숫자를 단순히 양(量)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질(質)-의미-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예수께 묻고 있다.
그러나 묻는다기 보다는 '일곱 번이면 족하지 않겠느냐'는, 말하자면 "이만하면 저의 자비심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하며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은근히 칭찬받고 싶은 내색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셈족의 숫자 개념으로 7이라는 것은 충분함, 충만함, 완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고 베드로의 예상을 뒤엎으신다.
단순히 7곱하기 70의 수량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셈족의 의미로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7의 70배수 즉 끝없는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해주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너는 그를 단 한번도 용서해준 적이 없어야 한다." 라고...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용서>는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이다.

 

경험상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중 하나가 용서인 것같다.
그렇게 힘든 것은 용서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무한대의 용서>라는 것은 결국 수를 헤아려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수를 헤아려 볼 수 없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그 수만 세어보고 있던가 아니면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숫자 영<0>의 상태를 고르던가 둘 중의 하나이다.
나는 <0>을 선택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최후의 심판(마태 25장)의 비유에서 나오듯이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을 해 드렸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도 같은 맥락의 모습이다.
무슨 말인가?

 

도대체가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의식> 조차도 없는, 늘 그런 습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최후의 심판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이고,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선행은 이미 체질화 되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바도 없고, 기억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용서는 기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일이 수를 세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미 용서가 아니다.
단 한번도 용서했다는 기록조차 머리 속에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랴?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제시하는 말도 안되는 비유에 그 답이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말에 이어 곧 비유하나를 들려주시는데 이 안에도 서로 대조해볼 수 있는 숫자가 등장하고 있다.
도대체가 있을 수도 없는 이 이야기(그것을 우화라고 한다) 안에서, 일만 달란트를 빚 진 사람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 속에 감추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노동자 하루 임금이 일 데나리온이니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백날을 일해서 갚으면 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6000일(20년)을 일해야 일 달란트(1달란트=6000데나리온)이니까,

일만 달란트면 20년 X 10,000= 즉 <20만년을 일해서 벌어야 하는 돈>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대대손손 일해서 갚아도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꾸어주는 황당한 왕이 어디있으며 또 그것을 한마디로 탕감해주는 이런 정신나간 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분이 "하늘나라"에 있다고(33절)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황당하고 정신나간 것 같은 왕인 하느님에게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빚쟁이들이란 말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끼리도 어떤 면으로든지 서로 빚(잘못이란 뜻도 있다)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빚은 왕에게 진 빚에 비하면 결코 빚이라고 말할 수도 없이 너무나 작은 것이어서 돌려주고 돌려 받고 할 것도 없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는 너희끼리는 근본적으로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히말라야 영봉을 등반하고 온 산(山) 사람은 뒷동산 정도는 체력단련의 놀이터가 되는 것처럼...
자신의 엄청난 잘못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다른 사람의 잘못 역시 이해가 되고 연민이 생기는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누군가를 용서 한다기 보다는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도 나와 같은 사람(동류의 인간)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나도 누구에겐가 늘 상처를 주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다만 화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 용서되지 않는다 싶을 때,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떠올려야 한다.

그러면 용서하지 못해 불끈 쥐었던 주먹의 힘이 슬며시 풀려나는 것을 느끼리라.

더불어 그 노여움의 속박에서 슬그머니 해방되리라.

 

 

ps. 전에 써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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