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복음산책) 창조주의 대원칙과 반길 수 없는 도피성의 선택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3 조회수1,135 추천수8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13일 (금) -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9,3-12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3)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7) 그들은 다시 “모세는 ‘아내를 버리려 할 때에는 이혼장을 써주어라.’ 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8) 예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10)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복음산책]  창조주의 대원칙과 반길 수 없는 도피성의 선택


  마태오복음에서는 공동체설교(18장)를 끝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는 지난 연중시기 10주간부터 참된 의로움을 가르치는 산상설교(5-7장), 참된 제자상을 훈시하는 파견설교(10장),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선포와 그 나라의 신비스러운 성장을 일곱 가지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는 비유설교(13장), 그리고 복음의 씨앗으로 건설된 교회 구성원들을 위한 공동체설교(18장)를 듣고 배웠다. 아울러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거점으로 북쪽과 동쪽의 시로 페니키아 지방과 바테네아 지방, 데카폴리스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가난한 자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여 그들을 위로하시고, 병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시는 놀라운 사랑과 자비의 행적을 눈으로 보았다. 이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신다.(마태 19,1) 자신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16,21; 17,22-23)를 성취하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예루살렘 입성(21,10)까지를 우리는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한다.


  마태오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는 일단 마르코복음 10장의 흐름을 미소한 수정과 함께 크게 따르고 있다. 마르코복음 10장은 결혼과 이혼논쟁, 어린이 축복, 부자청년과 낙타와 바늘귀 비유, 예수추종의 법칙과 추종에 대한 상급, 세 번째 수난예고, 예리고의 소경치유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마태오는 자기 고유의 두 가지 특수사료를 삽입하였다. 하나는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獨身)에 관한 단절어(19,10-12)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 길을 떠나신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소박해도 좋으냐는 질문으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왜 느닷없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결혼과 이혼문제를 들고 와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 것일까? 그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법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일부다처제도 허용하고 있었다.(신명 21,15) 게다가 남자에게 여자는 항상 위험스러운 존재로 여겼고, 경건한 자들은 여자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기는커녕 아예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다. 결혼한 여자가 독신 남자나 비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으면 간음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혼인한 남자가 그와 동일한 행위를 해도 간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여자는 남자와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혼인법이 완전히 남자의 편에서부터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간음을 예방하려는 경우에도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려기보다는 여자의 위험성을 더 강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를 유혹하는 남자는 자신의 혼인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혼인을 깨뜨리는 결과가 된다. 이런 통념 위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에 관한 두 가지 이견을 보였다. 바리사이 샴마이(Shammai)파는 아내가 간음한 경우만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여겼고, 바리사이 힐렐(Hillel)파는 아내가 남편에게 불만스러우면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자유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찾아왔고, 예수께서 답을 주셔야 한다.


  예수님의 답은 딱 한 하나다. 처음부터 아버지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며,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창세 1,27; 2,24) 무슨 말인가?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 앞에 부부로서의 짝을 맺으면 둘은 ‘한 몸’이라는 것이다. 하나가 된 몸을 어떻게 다시 가를 수 있는가. 가르면 둘 다 죽는다. 하나가 된 부부를 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느님뿐이다. 물론 모세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줄 수 있다고 했다.(신명 24,1) 여기서 ‘수치스러운 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바리사이 샴마이파와 힐렐파의 이견(異見)과 같이 결과는 달라진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내의 음행으로 간주하여 이 경우의 이혼을 허락하시는 듯하지만(9절), 천만부당이다. 예수님의 원칙은 어느 경우에도 같다. 우리는 이 확고부동한 창조주의 원칙을 십계명의 제6계명(출애 20,14; 신명 5,18)과 제9계명(출애 20,17; 신명 5,21)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산상설교에서의 해석(마태 5,27-32)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결혼을 하여 부부로 살든, 결혼을 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났든,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복음과 하늘나라를 위하여 살든, 여성의 권리와 고유성은 언제나 중시되어야 하며, 여성의 고유한 삶이 남성의 욕망이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위협받아서는 아니 됨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어떤 모양의 삶을 선택하든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도피성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