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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4 조회수1,244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14일 (토)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1894-1941) 사제 순교자


  다른 날과 똑같이 어느 날 아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많은 죄수들이 열을 지어 점호를 받고 있었다. 독일장교는 지휘봉으로 죄수를 찍기 시작하였다. “너!”, “너!” ... 간밤에 한 명이 탈출을 시도한 대가로 10명이 목숨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임의로 찍힌 10명의 죄수들은 아사형(餓死刑)으로 죽어야 했다. 마지막 열 번째 사나이가 지목을 받자, 그는 “난 죽기 싫소, 나에겐 자식과 아내가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바로 그 옆에 콜베 신부님이 서 계셨다. 아무 머뭇거림 없는 신부님의 행동이 이어졌다. 장교 앞으로 한 발짝 나선 신부님,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해 죽겠소!” 하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8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라이몬드이며, 1911년 형과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2-1919년 로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수학 중에 1917년 죄인들과 미신자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를 조직하였고, 191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와 바르샤바 근처 니에포칼라노우에 수도회를 건설하여 사업 확장을 위한 일환으로 월간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다. 1927에는 ‘무염성모의 마을’도 세웠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1922-1939)의 요청으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나가사키)에 파견되었고, 그곳에 선교를 위한 지부를 만들어 열심히 일했고, 1936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피난민들과 희생자들, 특히 유대인들을 돌보게 된다. 그 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1941년 2월 17일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을 거쳐 결국은 섬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이름난 아우슈비츠(Auschuwiz)로 끌려갔고, 여기서 폴란드인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0일간의 식음전폐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정신과 얼굴에는 광채를 보였다고 한다. 1941년 8월 14일 결국 수용소 장교의 지시로 페놀 주사를 맞고 죽었으며 화장되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독일 나치를 통한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오늘의 복음]  마태  19,13-15

<어린이들이 막지 마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3) 그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14)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복음산책]  깨끗한 빈손의 진리


  갈릴래아에서 공동체설교(마태 18장)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셨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으로, 당신을 잡아 심문하고 사형선고를 내릴 백성의 원로와 대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의 활동기간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했다. 마태오복음은 대체로 마르코복음 10장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엮었다. 여기에는 마태오의 독자적인 사료로 보이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생활’(19,10-12)에 대한 가르침과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20,1-16)가 첨가되어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논쟁을 벌인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이다. 마태오는 마르코복음(10,13-16)을 그대로 따르면서 두 부분을 삭제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께 축복을 요청하자 제자들이 먼저 이들을 나무랐다고 한다.(13절)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14절) 하고 말씀하시기 전에 화를 내셨다고 했는데 마태오는 ‘화를 냈다’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마태오는 화를 낸다는 것이 예수님의 성정(性情)에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마르코복음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절) 라는 말씀도 마태오는 뺐다. 그 이유는 마태오가 이 말씀을 이미 공동체설교의 첫 번째 규범(18,3)에 삽입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가까이하신다. 이런 부류에 물론 어린아이들도 속한다. 어린아이들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모자라고 불완전하며, 부모와 선생 등 그 사회의 성인(成人)들에게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성인(未成人)들이고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이다. 어린아이들의 표본은 배움과 수용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 축복을 청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려던 어른들을 제자들이 나무란 것에 화를 내셨다면(마르 10,14), 제자들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의 표본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기대면 기대수록 다른 것을 믿거나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믿음과 수용 외에 어떤 것도 이를 받을 수 없다. 바로 어린아이들의 가진 것 없는 빈손과 설레며 기대하는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태도이다. 이 태도의 상징인 이마(머리) 위에 예수께서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15절)


  가톨릭교회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신 축복에 힘입어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신학을 정립하였다. 아이들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자신의 지력과 능력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하여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머리 위에 예수님의 축복이 깃들여 있고,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도 늘 어린아이처럼 배움과 수용의 태도를 가진다면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14절)이 된다. 아이들의 미숙한 신앙 뒤에 어른들의 강한 신앙이 후견(後見)으로 자리하고 있음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깨끗한 빈손과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을 상업수단으로 삼거나 거기에 아무 것이나 가져다주려는 어른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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