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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시 쓰는 파리의 연인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6 조회수1,123 추천수1 반대(0) 신고
독서: 에제 24,15-24
복음: 마태 19,16-22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는가' 고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를 따라오너라.' 그 안의 대담들은 이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당신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과 그 길에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소용이 없으니 다 버리고 '너만' 오라는 것이다.

다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청년은 항상 '무슨 선을 행해야 할까?'하는 자신의 선행에 집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질문의 방향을 '선하신 분'에게로 돌리고 있다.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인간의 행업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기에 다시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지켰느냐고 묻고 있다. 613조나 되는 율법, 그 중 뿌리가 되는 최소한의 법,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서야 어찌 영원한 생명을 꿈이나 꿀 수 있으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바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젊은이의 대답이다. 그가 자신있게 그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라는 젊은이의 질문. 그는 분명 마음 속에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에 늘 골몰하고 있던 신심깊은 사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 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산상 설교의 요구이다.

마태오복음은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완덕의 길을 소개한다. 그러나 참 행복을 얻는, 그 완덕의 길은 인간 스스로 이룩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가난한 사람'이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분의 도움과 은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임을 알려준다. '영이 가난한 사람'이란 바로 오늘 복음의 앞 대목에 소개된 가진 것 없이 예수를 따라오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계명의 준수, 공적의 탑쌓기가 아니다. 그러기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또 하나의 선행까지도 종국의 목적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대담은 결국 오직 선하신 한 분 하늘 아버지와 일치하는 완전함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청년이 품고 있는 의도-'완전한 선행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태도'를 전복시키실 의도를 지니셨다. 왜냐하면 완전한 덕행(=완덕)은 인간이 이룩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한 분, 하느님'만이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대화 서두에서 슬며시 힌트를 주셨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청년의 자유의지에 내맡기는 조건절이다. 청년은 그 길을 따라도 되고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다.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다고 한다.

"삼촌은 가진 것도 지킬 것도 너무 많아서 태영이 힘들게 할 게 뻔해. 난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어. 태영이 하나야." 장안의 화제가 된 파리의 연인에 나오는 수혁의 대사다. 우리는 그런 재벌도 아니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진 것이 너무 많고, 지킬 것도 너무 많다.

알량한 재산이지만 조금은 있고 체면이나 자존심 지킬 일도 많다. 어떤 일을 합네하고 명함에 덧붙일 일들도 좋아하고 그것을 위해 때로는 힘에 벅찬 일도 하고 다닌다. 게다가 어떤 선행이라도 했다하면 그 목록들을 힘줄에 새겨넣어 점점 뻣뻣해지기도 한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을 주렁주렁 나에게 덧붙이고 있고 또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인생을 산다.

오늘 예수께서는 너를 둘러싸고 있는 그런 구차한 것들은 필요없다고 말씀하신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너 하나! 뿐이라 하신다. 너하나만 나를 따르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의 대변자인 에제키엘은 아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 못하고 슬픔을 표현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애인이 떠나가고 기본적인 감정조차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상심한 하느님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분을 두고 언제나 딴 것에 집착하고 딴 것에 공을 들이던 애인이었다.

그런 하느님을 또 다시 만들어야할까?
내가 가진 것들이 그분보다 더 중요할까?
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할까?

나를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버리신 그분이신데...
네가 가진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직 너 만 필요하다는데....
너 하나의 마음만 와도 된다는데...
넌 어떤지 모르지만 내 마음엔 너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수혁이 보다 더 애절하게 그분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파리의 연인의 결말은 이제부터 내가 다시 써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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