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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짜 아무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19 조회수1,241 추천수8 반대(0) 신고

독서: 에제 36,23-28
복음: 마태 22,1-14

 

복음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거나하게 준비하고 백성들을 초청하는 왕과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낸 사절들까지 모독하고 죽이는 백성들이 등장한다.

 

현실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우화에 속하는 이 이야기는 종말론적 잔치에 초대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온갖 준비를 마친 하느님과 그것을 끝내 외면하는 하느님의 백성(유다인)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먼저 초청한 백성들의 무관심과 박대와 모독 행위에 몹시 노한 임금은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70년경의 예루살렘 파괴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그 사건이야말로 주님의 징벌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리고 오라 한다. 임금이 보내는 종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다. 그들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대로 데려온다. 그야말로 '아무나'인 것이다.

 

이 비유에 앞선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에서도 유다인들이 거절한 구원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해서 줄레 줄레 따라나서기만 하면 될 것인가?

 

손님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 들어선 임금은 돌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아무나' 길거리에서 데리고 왔는데 무슨 예복이 있단 말인가?

 

이 이야기가 우화라는 것은 이 안에 많은 상징이 함축되어 들어있다는 말이다. 아들의 혼인잔치로 표상되고 있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종말론적인 일치'. 이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를 받은 우리 각자는 실은 잔치의 신부이고 주인공이다.

 

그리스도와의 합일, 그 아름다운 신방을 꾸미기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준비를 다 마쳤는데, 정작 그 날의 가장 아름다운 신부여야 할 우리는 아무 준비가 없이 잔치를 치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 독서에서는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기 위해 정화수를 끼얹어 주겠다고 하신다. 정화수로 온몸을 씻고 주님의 새 기운을 불어넣어주면 '돌처럼 굳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 정화수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눈물이다. 우리는 그분의 피와 눈물로 깨끗이 씻김을 받았으나 그분의 기운을(성령) 받아 들여 새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제서야 그분의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가 정성되이 준비하신 혼인 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입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정 통회의 정신이다(오늘 화답송). 우리가 준비할 것은 그래서 보드라운 살과 같은 회개의 마음이다(4,17-그리스도의 선포 첫마디임을 상기하자). 바로 그것이 이 기쁜 혼인잔치에 입장하기위한 신부의 '예복'인 것이다.

 

결국 구원은 '누구에게나'(선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열려있지만,

'아무에게나'(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흔히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에 기대어 종국엔 '누구나'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 두 가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
하느님이 모든 인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스 큉-"믿나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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