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8월 22일 야곱의 우물 - ♣ 구원 ♣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2 조회수941 추천수3 반대(0) 신고
    ♣ 구원 ♣ 교회를 찾는 동기는 다양하다. 이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구원이란 무엇인가?신학적 으로여러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하느님 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할 게다.
    하느님의 일부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같이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은 한계 안에서 산다. 그 한계 를 넘는 삶으로 진입, 곧 신학적 용어를 빌리면 '지복직관 (至福直觀,Beatific Vision)'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일 게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려 했던 하느님 나라는 마음 안에서 시작 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결국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잘 산다는 것, 어쩌면 가장 힘든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신다. 힘을 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정이라 할 때, 이 여정으로 인해 영원하고 그 분의 약속이 깃든 시간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의 문은 좁다'는 말은 잘 산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포기할 일이 아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된다.
    단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나의 의지도 약하디 약한 바람 앞의 등잔불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 2004년 "야곱의 우물"에 나오는 매일 성서묵상 8월 22일자. 일본 시부까와 천주교회 김대열 신부님의 글입니다. 》 ※ 오늘의 복음: 루가 13,22-30절 말씀입니다. ※ 그때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 구원 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 리며 '주인님,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잠언 22장 14절] 나에게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쳐,참되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 누가 물을 때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 안나의 묵상나누기 】
† :) † 구원이라는 것이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가 됨을 알았습니다. 유한한 우리들이 '한계를 넘는 삶으로 진입하는 것'!! 예전이나 지금이나 읽을수록 곱씹고픈 야곱이 묵상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려 했던 하느님 나라는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결국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잘 산다는 것, 어쩌면 가장 힘든 말인지도 모른다. 98년에 영세를 받고 주임신부님께 인사드리러 일부러 사제관으로 찾아뵈었을 때 내게 해주신 말씀은 '자~알 살 아 야 됩 니 다!' 였습니다. 지금은 선종하신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이셨던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 그분의 짧은 한 마디를 아버지의 유언이라도 되는듯 가슴판에 새겼기에 아.버.지. ...!라고 불러 봅니다.
그 분의 강론은 신교안에서 듣던 긴긴 메세지보다 짧았으며,어디 한번 열을 내서 말씀하시는 적이 없으셨지요. 언제나 넘넘 짧아서 아쉬움으로 남아,강론대에서 떠나셨는데도 계속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사제로 지내오신 老신부님의 짧은 강론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로사리오 축일에 들었던 묵주기도에 대한 유래는 살아생전의 선명한 모습으로 지금도 귓가에 들립니다.강론못지 않게 안나에게 개인적인 그 한마디는 나의 육신을 낳아주신 아버지의 말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살아야 됩니다...잘 살아야 됩니다...잘 살아야 됩니다... 되새기는데...왜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이 힘이 들어서일까요?/ 잘 살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잘 못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잘 살아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국을 떠나온지 3년만에 가을 여행을 계획하다보니 오랫동안 만나 뵙지 못했던 가족들이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30년만에 만나는 남,녀 동창들과의 해후!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그리고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 아버지의 가족들인 9남매가 왜 생각이 나는지...잠을 뒤척입니다. 그저 혈육이라는 것 하나뿐이 인연이 된 것이 없는데...왜 자꾸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창45,8] 그러니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저는 요셉처럼 옥살이를 할 만큼의 진한 고통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거창하게 성공을 한 뭣도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요,한 여인의 며느리인 아낙일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인물은 그저 성서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 나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힘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그립지 않았을 사람조차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랬구나...고국을 떠나온 의미가 읽혀집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것이 어느것도 거칠 것이 없는 나이입니까. 분명한 것은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한계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니, 마음이 점점 용서라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로 부터 탕감받은 죄 값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입니다. 내 안에 솟아나는 뜨거운 사랑이 모든 것을 보담을 것입니다.
잘 죽고 싶습니다. 그래서 잘 살것입니다.그것은 커다란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예전에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할 게다. 하느님의 일부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같이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 묵상 글을 또박또박 몇 번을 읽어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일부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같이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관상하는 삶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는...

    안 나 가 요*^^*
♬ Maranatha! Alleluia! 마라나타 알렐루야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