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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이력서
작성자권상룡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3 조회수1,078 추천수4 반대(0) 신고

하느님의 이력서

 

창세기에 나타난 하느님: 엄한 절대적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괘심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가 변명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아 때의 하느님: 인간과의 약속에 의해 제약을 받는 존재 변한다.
지구상의 인간들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셔서 마침내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멸망시키려고 결심했지만 원래 마음이 여리신 하느님은 곧 그런 결정을 후회하면서 노아의 가족들과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이 '다시는 홍수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무지개라는 표시로 인간들과 하나의 약속을 체결함으로 스스로 자기를 묶어 놓으셨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절대군주의 자리에서 인간과 약속한 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 입헌군주의 자리로 내려앉고 만 셈이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의 하느님: 하느님께 반문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한다.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아브라함이 "하느님이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같이 멸망시키다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적어도 공정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라고 감히 이의를 제기할 만한 처지가 된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아담과 이브와 같이 복종이냐 불복종이냐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가 완전히 맞먹고 흥정을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커 나가면 아버지가 점점 양보를 하게 되고 때로는 자식의 의견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라 하겠다.


모세 때의 하느님: 인간에게 자기 신분을 밝히는 처지 낮아진다.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셨을 때 모세가 당신의 출처를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소개시켜 드릴까요?" 하고 건방지게 묻자 하느님은 "나는 네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이다." 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하셨다.


다윗 시대의 하느님: 다윗 왕조의 체제수호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 전락한다.다윗 시대에 와서 하느님은 완전히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이 북쪽 유다나 남쪽 이스라엘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블레셋이라는 종족의 수도였던 제 3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점령해서 개인 사유지로 삼아 거기에 궁전을 짓고, 하느님의 법궤를 찾아다가 안치했다. 그리고 그 아들 솔로몬은 거기에 신전을 세웠다. 그때부터 세계의 창조자, 역사의 주재자인 야훼는 신전의 포로가 됨으로 인해 오직 한 왕조의 수호신이 되고, 한 도시, 더 좁게는 예루살렘 성전에 감금된 신으로 전락한다. 이제 하느님은 성전 밖에서는 만날 수 없게 되었고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선 비싼 교통비 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순례라는 풍습이 생겼다. 예루살렘에 와서도 신을 배알하려면 제물을 바치는 등 사제 계층이 만들어 놓은 복잡한 의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요나 때의 하느님: 말 안 듣는 예언자에게 당신의 사명을 맡기시는 처지 된다.사명을 저버리고 자기는 하느님과는 아무런 볼일이 없다고 살살 피해서 도망 다니는 요나를 쫓아다니면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 걸릴 만큼 굉장히 커다란 도시인 니느웨를 향한 당신의 뜻을 차근차근 일러주시기까지 하셨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들을 향해 요나의 기적밖에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루가11:29)는 말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사흘 밤낮을 있었듯이 사흘 뒤의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 시대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사이 친숙한 가족이 된다.
만약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면 적어도 인간 중에는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나타나신 모습은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의 모습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를 空(공)의 상태, 無(무)의 상태, 虛(허)의 상태로 낮추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모습이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 달라졌다기보다 인간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점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혹은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다르다. 사람에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아직도 아담과 하느님과의 관계같이 절대군주와 노예 같을 수도 있고, 아브라함과 하느님같이 터놓고 지내는 수도 있고, 모세와 같이 실례되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수도, 또 요나 같이 하느님을 약오르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자신을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그릇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을 얼마나 많이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기성교회에 도전하는 지성수 목사님의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이라는 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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