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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에 나타난 하느님의 두 얼굴
작성자권상룡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3 조회수1,205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에 나타난 하느님의 두 얼굴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절까지의 창조 설화와 2장 5절 이후의 창조 설화는 완전히 상이한 두 가지 고대문서가 짜집기 형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첫 번째 이야기를 기원전 6세기에 생긴 제사문서에 속하는 이야기로, 두 번째 이야기를 기원전 10세기 경에 생긴 야훼문서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이야기에 나타나는 문체에 있어서도 첫 번째 이야기는 제사에 쓰는 문서답게 축문 형식으로 근엄하고 공식적인 문체로 된데 반해, 두 번째 이야기는 완전히 간결한 이야기 형식의 문체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더욱 뚜렷한 차이점은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의 하느님은 그 이름부터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문서에 나오는 하느님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의 하느님이고, 두 번째 문서에 나오는 하느님은 야훼(Yahweh)라는 이름의 하느님이다. 엘로힘 하느님과 야훼 하느님은 이름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각각 천지를 창조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엘로힘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방식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단숨에 다 지으시고, 일이 완성되었을 때 보시니 참 좋았다며 극히 만족해하시면서 일에서 손을 떼시고 무대 뒤로 사라지신다. 그리고 수정 작업이나 추가보수 작업 같은 것은 하시지 않는다. 문제는 둘째 이야기에 나오는 신과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이다.

 

야훼 하느님이 세상을 지으시는 방법은 훨씬 인간적이다. 우선 그 무대배경부터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 같은 우주적인 스케일이 전혀 아니다. 야훼 하느님은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도 없고 풀 한 포기도 없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 등장하는 신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기 시작하자 드디어 창조사업에 착수하신다. 손수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다 '후!'하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둘째 이야기에 나오는 신은 일단 사람을 먼저 만들어 놓고 보니까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하구나?' 생각하시고 동산을 일구시고 짐승과 새를 만드신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사람이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음을 알고 다른 인간을 만들어 주기로 작정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야훼 하느님은 일을 해가면서 계속 계획을 수정 보완해나가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추방으로 결국 실패작으로 끝난 에덴동산은 쓸데없는 공터로 남게 된 것이다.

 

특히 둘째 이야기에서 도저히 전지전능하신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전지전능하신 신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숨어있다고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실 필요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끝까지 다 아시는 신이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런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구태여 그런 시험을 해볼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단 한 번의 실수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땅과 함께 자자손손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것인가? 도대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인지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왜 그리 못할 짓인가?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 요건이 아닌가? 모든 신자들이 교리시간에 창세기의 원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한 번쯤은 이와 같은 의문을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두 가지 창조 설화 중 어느 것을 정말로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5일에 새들을, 6일에 짐승들을 만드시고, 그리고 나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둘째 이야기에서는 사람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짐승들을 만드시고 새들을 만드셨다고 했다. 물론 첫째 이야기는 천지창조의 총체적인 이야기고 둘째 이야기는 몇 가지 세부적인 것을 만든 부연적인 설명이므로 보완적이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할 경우 시원한 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들이다. 성경의 일차 목적은 우리에게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기본적으로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중엔 진화론은 마귀의 이론이고 창조론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없지 않아 있다. 창조론이고 진화론이고 그런 이론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론이 진리라며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나마 하느님이 손수 지으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파괴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진화론을 믿지만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일회용 제품들을 거부하면서 환경운동과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 과연 누가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더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는가?

 

창조이야기는 새와 짐승, 풀과 나무,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만물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온 형제자매라는 신령스런 공동체의식에 눈을 뜨는 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예수는 없다. 오강남교수 -창조 이야기의 딜레마와 교훈에서
아직 이 책을 접해보지 못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추천해보고 싶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의 신앙생활에만 갇혀 놓치고 있는 값진 정보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에 눈을 뜨게 해주는 책이라고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참고로 이 책은 2001년도에 출간된 책이어서 서점에서 찾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일단 구해서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정독하시면 새로운 안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삶 속에서 새로운 안목에 눈을 뜨는 순간들이야말로
마치 봄날의 나뭇가지에 새로운 싹눈이 열리는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푸르게 만들어 가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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