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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이력서
작성자권상룡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3 조회수1,382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님의 이력서
1. 교회 안에 상품화된 예수
후기 중세시대에 십자군들이 뻔질나게 예수가 생존했던 거칠고 메마른 팔레스타인 땅에 드나들면서 위풍당당하게 하늘로 치솟은 고딕식의 대성당에 오색이 찬란하게 그려진 예수가 실제의 예수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된 후로 교회 안에 가난과 청빈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비로소 왕 중의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가진 예수에서 왕관을 쓴 슬픔에 젖은 인간 예수로 신의 형상이 아닌 인간의 모습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는 찬송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생전 생리로 보아서 그런 것들을 끔찍이 싫어하였을 것이 틀림없다.(마르꼬10:17-18) 예수는 자신을 먹고 마시라고 했지 잘 대접해 달라고 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예수가 왜 그렇게 높고 귀한 곳으로 올라가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거기에는 깊고 깊은 야바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예수를 높이 올려놓아 종교적, 정치적 우상으로 만들어놓고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 지배그룹은 예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민중으로 하여금 예수를 숭배하도록 유도하고, 종교의 융성을 꾀하는 법인 것이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지배, 헤롯왕의 지배, 그 당시 종교 지배층의 수탈과 허례의식, 이런 이중 삼중의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분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90세의 늙은 대심문관이 러시아 교회의 대표로 이 땅을 다시 방문한 예수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 라고 명령하는 것이 나온다. 예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는 예수에 대해 지독한 비난을 퍼붓는다. 예수는 당시 사회와 교회를 지키는 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이고 특히 실제의 예수는 어떻든지 이미 교회 안에서는 만들어진 예수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이 쓴 "금관의 예수"에서 시멘트 상에 갇힌 예수의 모습을 그렸듯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예수의 원상복구가 시급하다.

 

2. 교회제도의 탄생: 가난이 죄가 되어 바리사이나 사두가이처럼 종교적 의무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마치 벌어  먹고 살자니 주일날 교회 못 가는 것같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몸을 파는 창녀가 되고, 강도, 절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예수가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은 그만큼 매일매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따르던 예수가 처음 올 때는 마구간에 조용히 왔지만 다시 올 때는 온 천지가 깜짝 놀랄 나팔소리와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실 권위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예수 재림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서 굳게 믿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는 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예수 재림에 대한 믿음은 차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교회라는 제도가 들어서게 되었다. 다시 온다는 메시아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로 바뀌고, 종말에 대한 기다림 대신에 제도화된 교회를 절대화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교회를 만들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던 분이다. 왜냐하면 이미 오랜 동안의 유대 교회의 경험으로 볼 때 교회를 만든다고 해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 교회는 가짜교회이고 지금의 기독교는 진짜 교회라는 식의 무지한 주장은 하지 말라! 그 당시 유대 교회는 초대 교회보다 훨씬 더 완벽한 교회였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어떤 조직이나 제도는 필연적으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느 종교이든 단순히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나 전통, 제도나 조직 혹은 예식 속에 진리가 있는 양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도 당시 종교제도나 조직, 교리나 예식 속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던가? 하는 것은 성서를 보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초대 교회라고 하면 이상적인 모습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천만의 말씀이다. 디모테 전서 3장을 보면 "감독은 탓할 데가 없으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남과 다투지 않으며, 돈에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말들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으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요한 묵시록을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7개의 교회중 온전한 교회가 하나도 없이 모조리 책망을 받는 것을 본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법도, 역사도, 종교도 왜곡하는 것은 역사이래 인간들이 저지른 가장 간교한 술책이었다. 이 점에서 기독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께서 말한 본 뜻은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예수가 말한 내용 중 조금이라도 교권이나 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으면 어느 새 그들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변조시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중세 암흑시대의 모든 것을 땅 위에 있는 기독교 왕과 교황이 통치하는 체제에 적응이 되게 해석해야만 했다. 한 때 김종필씨가 로마서 13장 "권세있는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가지고 박 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을 탄압했는데, 얼빠진 목사들이 그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했던 적이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결혼한 이래 기독교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 의해 길들여진 종교가 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십자가를 금으로 바꾸어주고 십자가에서 예수의 정신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교회라는 제도만 남게 된 것이다.

 

3. 선교사들의 죄: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치셤 신부는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있을 때 세 사람의 수녀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자의 수녀들은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수녀원 학교 학생들까지 끌어들이는 추태를 보인다. 선교사가 빠지기 쉬운 가장 위험한 함정은 사람을 종교로 인도하기보다는 종파로 이끌어들이려 하고, 예수에게로 인도하기보다 교회로 불러모으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있는 것이다. 이단 중에 가장 징그러운 이단은 자기 교회만이 옳은 교회, 자기 교파만이 옳은 교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 외에는 모두 이단이나 삼단으로 취급해버리는 졸렬한 신앙 태도가 아직도 우리 나라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들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고,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려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한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로다. 나는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라고 하셨다. 단재 선생의 말씀대로 예수도 역시 조선의 예수가 아니고 예수의 조선이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2000년 전의 베드로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고 2000년 이후의 한국사회라는 구체적 삶의 현장과 한국역사라는 토양 위에서 한국인을 위한 신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외국 신학의 화원에서 꺾어다 놓은 꽃이 되어서는 안되고 한국의 밭에서 피어나는 꽃이라야 한다.
 
4.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 인간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는 인간다운 사고와 행동과 정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 종교의 노예가 되어있던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며 율법의 멍에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했다. 그러한 예수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만들어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람들을 다시 매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본 훼퍼는 " 예수는 인간을 새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삶이 하늘 나라의 초대로 비유되고 있고, 그런 자기 변화에로 들어서기 위한 관문으로 회개를 말하고 있는 것이 복음성서의 주테마가 아닐까?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17:20-21) 우리 각자 안에 좁은 문으로 닫혀 있지만 자기 변화라는 회개의 열쇠로 열려지는 것이 천국의 실체가 아닐까?

 

지성수 목사님의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에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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