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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마지막 불행선언 (6,7)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4 조회수1,321 추천수8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25일 (수) -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 성 루도비코 (1214-1270)


  루도비코 성인은 1226년 만 11세의 나이에 선왕을 이어 루도비코 9세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으나 대비(大妃)가 섭정(攝政)할 수밖에 없었다. 대비는 1236년 성인이 친정(親政)을 할 때까지 왕위를 잘 지켜주었다. 성인은 어머니로부터 경건한 종교심을 물려받았으며, 프로방스의 마가렛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성인은 왕으로서보다 그가 입회하길 원했던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처럼 살았다. 그는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빈자와 병자들에게 대한 관심이 지극하여 그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기까지 하였고, 구호소를 세워 구제사업을 펴기도 했다. 사순시기에는 자신은 물론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재를 지키도록 권하였다. 124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루도비코 왕의 명성은 영국에서 비잔티움에 이르기까지 드높았고 그와 함께 유럽에서 프랑스가 우뚝 서게 되었다. 성인은 국가들 간의 분쟁 해결사 역할도 수행했다. 성인의 노력으로 1248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축성되기도 했다. 성인은 2번 십자군 원정을 지휘하였는데, 1248년에는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로 진군하였고, 이 때 성 십자가의 대못을 찾아 유물로 가져갔다고 한다. 1270년에는 북아프리카로 진군하여 튀니지로부터 카르타고의 옛 성곽을 정복하였으나 십자군들이 전염병에 걸려 대부분 죽고, 성인도 병에 걸리자 십자가형으로 잿더미 위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의 시신은 성 데니스로 옮겨져 묻혔고, 성인의 심장은 항아리에 담아 시칠리아의 몬레알레 대성당에 안치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297년에 루도비코를 시성하였다. 성인은 오늘날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스페인, 예수회회원들 사이에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의 복음]  마태 23,27-32

<너희는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다.>


  2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29)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떠들어댄다. 31)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복음산책]  마지막 불행선언 (6,7)


  권력(power)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권력이란 아주 ‘위험한’, 그러면서도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로서, 직무나 직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권력은 ‘물리학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러셀)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바가 불순하거나 부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악(惡)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선(善)하다 하더라도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의 ‘결과’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목적이 항상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권력을 ‘선(善)이라고 생각되는 장래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한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율법을 보호하고 전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목적이 선(善)이었다고 하나 그 결과는 악(惡)을 초래하였다. 선의의 목적이 악을 초래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다.(마태 23,16.17.19.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치욕적인 불행선언이 잇따른다.


  여섯 번째 불행선언은 율사들의 속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의 ‘겉과 속’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무덤의 외부를 회칠하는 이유가 내부를 덮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내부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겉치장한다 하더라도, 화려한 겉치장으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하려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은 속이고 겉은 겉이다. 다소 옳게 보이는 겉모양이 속내를 가릴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율사들의 속내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불행선언은 예수님 당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의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상들과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과 차별을 두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 주장이 그들 스스로를 살인자, 박해자의 후손임을 자백하는 것으로 지적하신다.(31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는 것’(31절)이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심하고 치욕적인 예수님의 언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언변은 유다교의 총체적인 종말을 의미하며, 야훼 하느님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무덤의 겉과 속처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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