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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만연한 교만과 허기진 이해득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29 조회수1,521 추천수6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29일 (일) - 연중 제22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가 14,1.7-14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로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너는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


[복음산책]  만연한 교만과 허기진 이해득실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베어있는 우리에게 예전까지만 해도 중용(中庸)사상은 미덕 중의 하나였다. 중용이란 매사를 처리할 적에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무과불급(無過不及)의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중용을 희구(希求)하는 정신은 유가(儒家)에서 전인간적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수양의 최고수준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용의 덕은 끊임없는 자기감정의 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중용은 곧 극단 또는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방법이나 태도를 취하는 신중한 실행 및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편향(偏向)하지 않는 것이고,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일정불변함을 뜻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다. 편을 만들어 갈라서고, 한번 갈라서면 지나치게 기울고 치우쳐 상대방을 근거 없이 반대하며, 한편만 보고 다른 한편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 애를 쓰고,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남의 것을 넘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우리들이다.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돌보고 굶어 죽어도 남을 것을 탐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이 타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우선지국’이 되어 더불어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일등(금메달)이 아니면 안 되고, 최고와 일류가 돼야 한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며, 졸면 죽는다고 한다. 남을 딛고 이용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우리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우리들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말씀은 경종을 울린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그래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의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고, 둘째는 식사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 지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유교가 가르치는 중용의 미덕보다 우리의 관행을 뒤엎는 역설(逆說)의 가르침을 주신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윗자리보다는 낮은 자리에 가 앉으라고 하신다. 이는 곧 겸손과 겸양을 말한다. 예수께서 얼마나 자주 겸손을 강조하셨는가? 회당에서 윗자리를 다투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윗자리를 다투는 제자들까지도 싸잡아 나무라시면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여질 것이라고 하셨다.(루가 9,46-48; 11,42) 구약성서에도 야훼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다.(잠언 3,34; 18,12)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이다.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노자(老子)도 겸손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한번도 높이 가려하지 않으며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자신을 베푼다고 했다.


  겸손과 겸양은 참으로 좋은 덕이다. 누구든 이 덕을 한번이라도 행한 사람은 그 놀라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겸손과 겸양은 사람을 결코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이다. 겸손은 의기소침도 아니고 자의식에 대한 결핍도 아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에 대한 기쁨이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나보다 너를 먼저 찾고, 너보다 하느님을 먼저 찾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가르침은 잔치를 마련하고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가난한 자,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도로 갚음을 받을 자를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진수성찬(珍羞盛饌)의 연회를 준비해 놓고 길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 등 면식(面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초대할 주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의 모든 경우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눌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초대받아 가서 베푼 만큼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끼리는 서로 즐거울지 모르나,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없다. 도로 갚을 수 없는 사람을 대접함으로써 하느님의 갚음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가시적인 면과 비가시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그 속내가 더 중요하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정중한 ‘술과 식사의 초대’는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허기진 이해득실’을 동반한다. 이 경우 초대는 향응(饗應)이 된다. 투자한 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경우 대인관계가 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에 기초한다는 현실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오늘은 우리의 교만과 허기진 이해득실의 가면을 벗고 겸손과 거저 베푸는 태도로 이웃을 만났으면 좋겠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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