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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03 조회수1,352 추천수9 반대(0) 신고
 

◎ 2004년 9월 4일 (토)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6,1-5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1)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 몇몇이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다윗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밖에 먹을 수 없는 제단의 빵을 먹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복음산책]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5,17)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이미 반감(反感)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병의 뿌리로 간주되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들은 트집을 잡았다.(5,20-21) 이는 그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다분히 종교적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의 기존 정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래 감시자의 눈에는 좋은 것은 안 보이고 하자(瑕疵)만 보이는 법이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의 일행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다. 루가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삭제해버렸다.


  남의 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에 낫을 대지 않고 그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다.(신명 2,26) 그런데 문제는 이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야 함은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출애 20,8) 이 계명의 세부규정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쉬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출애 31,15; 35,2; 레위 23,3) 여기서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것’의 목적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철저하게 쉬는 것인지 말이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세부지침을 만들게 된다.(미슈나 샤바트; 예루살렘 탈무드 참조) 바로 이 39개의 금령(禁令)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 즉 추수(秋收)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은 제자들의 행동은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 법을 위반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


  예수께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일행이 몹시 굶주린 나머지 제단에 바쳐진 빵을 먹었다(1사무 21,1-10)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법에도 예외규정을 있음을 환기(喚起)시키신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한낱 예외규정으로 제자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신 것이다.(느헤 9,14; 이사 56,4; 에제 23,38) 루가가 마르코복음을 베끼면서 27절(“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을 삭제한 이유도 이점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가는 예수께서 율사들에게 하신 답변의 인본주의적 법이념보다 그리스도론적 법이념에 역점을 두려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통상 주일의 성화(聖化)는 주일미사 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일미사 참례의무는 교회법이 명기하고 있듯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교회법 1246조) 그렇다고 주일미사 참례 하나만으로 주일성화의 계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일의무가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주일의무는 안식일 다음 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인류의 죄를 씻고 세상에 구원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은 분명 부활신비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요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날인 셈이다. 따라서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다. 사람의 법은 법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존재이유는 법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그 정신이 비록 인본주의(人本主義)에 있다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복종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며, 때로는 인정사정(人情事情)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인정(人情)도 있고 사정(事情)도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느님이 그 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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