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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 (Agere seguiture Esse)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07 조회수2,852 추천수8 반대(0) 신고

몇 년을 같은 본당으로 말씀을 봉사하러 다니게 되면 누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 본당의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인품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됩니다.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불만이 많은 어떤 성당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해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울을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는데도 살려주는 장면을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부하들이 모두 사울을 해치우자고 했지만 다윗은 번번이 "하느님께서 기름부으신 분을 손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마침 그날 아침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같이 생각해보고  넘어가려고 예정에도 없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생각해볼까요?"

 

그날 아침, 강의 시간 삼십분전에 도착을 해보니 성서반 반장님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사무장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시게 되었다며 수녀원에 비상 열쇠가 있으니 가져다 쓰라고 전화가 왔답니다. 그런데 정작 수녀님께 말씀드렸더니 사무장이 직접 말을 안했다고 열쇠를 주지 않더랍니다. 사무실 열쇠가 없으면 마이크를 쓰지 못하게 됩니다. 강당엔 칠십명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장은 "어떻하죠? 어떻하죠?" 하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에 저는 아무 말도 않고 "성체 조배하고 나서 생각하죠." 하고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이상하게 화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분이 몹시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강의 시간 5분을 남겨놓고 내려왔더니 마이크가 제 자리에 놓여져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장은 한 소리를 듣고 눈물을 닦고 있었고 옆 사람들은 씩씩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성토가 일어났고 그 성당의 신부님도 비슷한 분이시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무 반응도 안보이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마침 그 대목이 나오니 저도 모르게 진도 보다는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서 '하느님이 뽑으신 사람'의 대표로써 성직자, 수도자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학교에서 교회법 시간에 배운 것을 그대로 떠올려 신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볼까 진심을 다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때로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부족한 인품 때문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미워하고 그 일 때문에 고해성사까지 보아야 하는 쪽은 또 언제나 평신도들입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직자 미워서 교회를 떠나야 하겠습니까? 다른 교회에 가면 안그런다는 보장 있습니까? 개신교 목사님들은 신도들이 갈아치우기도 한다는데 우리도 그래야할까요? 어떤 성직자를 원하십니까? 

 

"따듯하고, 기품있고, 검소하고 희생적이며 사랑 가득한 사제, 기도 열심히 하고, 강론 잘하고, 생각이 깊고 공평한 사제.... " 사람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마구 마구 쏟아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강의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날, 강의가 끝났을 때, 성서공부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말씀이었다고 박수를 뜨겁게 보내 주었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그 날의 강의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교회법 1008조는 성직자의 서품, 거룩한 교역자 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제정에 의한 성품 성사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불멸의 인호가 새겨지고 거룩한 교역자들로 선임되어, 각자 자기 계층에 따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도록 축성되고 임명된다."

(마침 제가 외우고 있어서 칠판에 적었습니다)

 

성직자란 누구인가? 위의 교회법에 의하면 성직자란 먼저 신품 성사로써 불멸의 인호가 새겨진 분들입니다. 즉 신품성사로써 존재론적으로 신원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리하는 삼중직무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는 기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즉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수행이라는 기능(활동)적 임무를 가진 분들입니다.

 

먼저 것은 존재론적인 변화요. 둘째는 기능적 변화입니다.

 

우리가 성직자들을 보고 때로는 존경을 보내고, 때로는 실망을 하는 것은 두번째 기능적 역할에 대해서일 것입니다.

 

따듯하고, 기품있고, 검소하고 희생적이며 사랑 가득한 사제, 기도 열심히 하고, 강론 잘하고, 생각이 깊고 공평한 사제.... 등등을 원하는 것은 거의 다 성직자들의 기능적 측면에 관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 (Agere seguiture Esse)는 것입니다. 이 말은 존재보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성직자의 기능이나 직무는 먼저 성사적 인호가 있는 이후에 따른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기능, 역할)을 잘해낸다고 해서 성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직자가 되었기에 그 일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자녀를 잘 돌보고 살림을 잘하는 것으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이 자녀를 돌보고 살림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거꾸로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무리 부족한 부모, 능력이 딸리는 부모라도 그의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일 잘하는 파출부가 우리의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엠 셈'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7살짜리 지능을 가진 아버지니까 다른 아버지로 대치해야 한다는 법정논란이 이 영화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샘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그런 이야기지요. 성직자는 성직자 자체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기능, 직무에 결함을 보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리로 보여주지 못한다 해도 그분 존재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하느님의 제정"이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제정',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성품 성사로서 하느님이 선택하셨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성직자에게만 해당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이 선택해주신 자녀라는 신분으로 이미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특출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학교 교회법 교수 신부님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누구보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성직자들이라는 것과 그러기에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제를 기른다는 심정으로 돌봐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들을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뽑으신'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예수님과 같이 기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교회법 강의를 들으며 이 부분에서 마음에 찡하니 감동을 받았었고, 저 역시도 사제에 대한 옳지않은 생각들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이 반성하며 들었던 강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성직자 뒤에는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다." 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밤을 새워 뽑으셨다는 그분들을 위하여 우리들도 함께 기도하고, 성모님의 마음으로 돌봐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과 연관지어서 '예수께서 밤새워 기도하고 뽑으신 제자들'의 면면이 그렇게 탁월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서 지나간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어 수도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강의를 했지만 그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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