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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 제2의 본성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11 조회수1,366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9월 11일 (토) -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6,43-49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4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4)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 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46)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48)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큰물이 집으로 들이치더라도 그 집은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물이 들이치면 그 집은 곧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복음산책]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 제2의 본성


  누구든 “사람은 본디 선(善)한가, 악(惡)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本性)이 어떠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사람은 선천적으로(a priori)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선설(性善說)을 따르는 것이고,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악설(性惡說)을 따르는 셈이 될 것이다. 문제는 태어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 선인으로 살고, 악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선하게 태어난 인간이 악인이 되고, 악하게 태어난 인간이 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의 경우 무엇이 된다는 것은 학습(學習)과 체득(體得)에 의하여 후천적으로(a posteriori) 형성되는 성품을 말한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40-?)는 ‘되어가는’ 과정에서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본성에서 유출되는 ‘됨’을 주장하였다. 이 두 철학자의 깊은 진리를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합하여 주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13세기 스콜라철학은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입장을 취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산상설교에 비해 짧게나마 루가가 보도하는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와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가르침은 각각 알아듣기 쉬운 예화, 즉 나무와 열매, 그리고 창고의 비유와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제시된다. 이 가르침으로 루가복음의 평지설교는 일단락된다. 마태오복음도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7,21-27)로 산상설교를 끝맺고 있다. 오늘 복음의 전반적인 구조는 ‘본성->행위->말’의 전개과정을 따르고 있다. 이는 본성에서 행위가 유출된다는 뜻으로서, 본성은 행위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행위와 말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행위와 말의 일치를 예수께서는 요구하신다. 이는 ‘말->행동->본성’의 역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써 말과 행위는 서로 다를 수 있는바, 말을 듣고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하던 그 행위는 결국 본성을 밝혀주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르고, 본성은 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자.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 - 나쁜 나무’와 ‘선한 마음의 창고 - 악한 마음의 창고’의 비유를 통하여 본성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다. 여기서 창고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결국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행동, 즉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셈이다.(45절)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속담이 원론적으로 틀린 데는 없지만 어쩐지 김새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본성과 행위의 관계가 이렇다면 너무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한 본성에 의해 평생 선인으로 살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악한 본성에 의해 평생 악인으로 산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다. 이는 억울하다 못해 절망적이지 않는가? 아무도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구별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억울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예수께 있어서 사람의 본성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악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선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중요한 것은 행동이고, 나아가 행동과 말의 일치다. 누구든 말과 행동의 일치를 도모한다면 악한 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를 좋은 성품으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당장은 악한 본성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48절) 그러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맨땅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49절) 예수님의 가르침(평지설교)을 따르고 실행하는 훈련은 결국 더 나은 성품(性品), 즉 제2의 본성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탓하고 주저앉아 더 선한 제2의 본성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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