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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아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9/12)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11 조회수1,173 추천수7 반대(0) 신고
 

연중 24 주일 (다해)

             출애굽기 32,7-11.13-14.     1디모테오 1,12-17     루가 15,1-32 

     2004. 9. 12.

주제 : 내가 아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찬미 예수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싶어서 돈을 쓰기도 하고, 시간과 노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하늘 까마득한 곳에 떠있는 땅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별을 향하여 몇 년 혹은 십 몇 년을 걸리는 곳으로 우주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특별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만든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서 헤엄쳤던 한 우주인은 ‘우주에서 하늘과 아름다운 지구를 보니, 이 아름다운 세상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오신 여러분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갖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두렵거나 피하고 싶은 분’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성당이라는 장소, 하느님을 공경하는 장소에 와서 앉아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 다음으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 삶을 모르는 체 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사는데 나만 못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을 잘 때까지 생각과 마음속에 다른 사람은 다 빼고 오로지 나만 잘되게 해달라고 청하는 욕심을 가득채운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믿는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크신 분이므로, 한 개인의 길흉화복을 갖고 장난치실 쩨쩨한 분은 아닙니다.


길게 읽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느님의 성격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세 개 나옵니다.  첫째는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 이야기, 둘째는 은전 열 닢을 가진 어떤 여인 이야기, 그리고 세 번째는 두 아들을 두었던 어떤 아버지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길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전하려던 하느님의 뜻은 한 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든지 ‘하느님은 선입견을 갖고 구별하지도 않고 차별대우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위해서 양 한 마리를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큰 모험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통하는 세상에서 소수를 위하여 다수를 소홀히 대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이 아니면 참으로 갖기 힘든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무시하거나 그 양들이 어떻게 되든지 좋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다시 찾으려던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모두 챙겨서 떠났던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에도 하느님의 뜻은 나타나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과 태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은 잘 알아들었던 사람들이고, 그렇게 알아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석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은 삶에서 무시해도 좋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귀중하게 대우하느냐?’는 것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불만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삶의 자세는 철저하게 다수결의 원칙을 중시하는 요즘 사람들의 태도와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은 들어있지 않은 태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신 것입니다.


오늘 미사에 오신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받아들이십니까?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나 몰라라 하고, 사랑은 없이 정의로 포장된 무자비한 칼을 들이대는 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마음을 돌이켜봐야 합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하느님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까지도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요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랑으로 대하는 하느님,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하느님의 성격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이 적용된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서 하느님이 하실 일들을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가능한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신 분도 있을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분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당장 원한다고 해서 하느님을 내 눈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뿐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것처럼, 에집트를 탈출한지 90여 일만에 벌어졌던 우상숭배 사건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의 고집을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못이기는 척, 모세의 고집에 굴복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특징은 사울이었던 바오로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모르고 했을 때의 일을 제대로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분들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2004년, 21세기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똑똑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하는 똑똑한 세상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며, 그 하느님의 뜻을 널리 펴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어떤 성격을 가지신 분입니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우리의 행동으로서 표현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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