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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 변화의 시작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20 조회수1,442 추천수14 반대(0) 신고
 

◎ 2004년 9월 21일 (화)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변화의 시작


  교회는 오늘 사도이자 복음사가였던 마태오 성인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태오의 죄인에서 성인에로의 길은 어느 날 자기 동네 어귀에서 한창 세관업무를 보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데서 시작되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출신으로 12사도들 가운데 자신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오는 마태오복음서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전직(前職)인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과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따라 나선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가 5,27-32) 마르코와 루가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동방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4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半信半疑)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不淨)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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