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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9-30 조회수1,284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9월 30일 (목)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성 예로니모 (345-420)


  우리가 성인들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뛰어난 미덕이나 또는 그들이 실천한 헌신적인 봉사 등을 기억한다. 그러나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성 예로니모는 그의 나쁜 성질로 유명하다. 비록 그가 아주 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은 너무도 열렬했다. 그에게 오류를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적으로 간주되었다. 성인은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 스트리돈에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례는 받지 않았다. 그곳에서 예비교육을 마치고,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공부하던 중 366년 세례를 받았다. 예로니모가 세례를 받은 데는 기막힌 이야기가 있다. 예로니모는 처음에 플라톤과 치체로의 책들에 빠져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꿈에 천사가 나타나 그 책들을 빼앗고 그를 천상의 심판자에게 데려간 것이었다. 이 꿈이 계기가 되어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성서읽기와 연구에 심취했다고 한다. 로마를 떠난 성인은 독일의 트리어(Trier)로 갔는데, 그곳에는 학자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는 가장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하여 매우 애쓰면서 가는 곳마다 몇 해씩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성인은 진정한 공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흔적을 살피면서 팔레스티나를 두루 여행했다. 성인은 신비적 명상, 기도, 참회, 연구에 자신을 맡기고자 칼키스 사막에서 5년을 보내기도 했다. 375년부터는 안티오키아에서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그 제자들과 함께 수학하였고, 379년 사제로 서품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리게네스를 공부하였다.


  382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교황 다마소 1세(366-384)의 비서를 역임하면서 교황의 요청에 따라 당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만 되어 있던 성서번역이라는 불후의 성업(聖業)에 착수한다. 그 때 성인은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와 칼데아어까지 능통한 대가로 변해 있었다. 성 예로니모는 무엇보다 구약과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서학자였다. 이 번역본을 일컬어 ‘불가타’라고 한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성서 번역본은 아니지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떤 현대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예로니모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 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적격이었을 뿐이다.” 다마소 1세 교황이 죽은 후 성인은 자신이 교황에 서임되기를 희망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몇몇 미망인 부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탄생지로 믿어지는 베들레헴의 동굴에 정착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성인은 ‘불가타’를 완성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정신적 영감의 큰 근원이 된 주석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열심한 학생이었고 완벽한 학자, 비범한 서간문의 작가였으며, 수도자, 주교, 교황 등의 상담자이기도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만물박사였다. 예로니모는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오늘의 복음]  루가 10,1-12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1) 그 뒤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2) 이렇게 분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3)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4)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9)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10) 그러나 어떤 동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길거리에 나가서 11)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하고 일러주어라. 12) 내 말을 잘 들어라. 그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복음산책]  선교임무의 핵심: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가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가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가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가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가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루가 9,1-6)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성사(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 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을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연대(連帶)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떤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싸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인(義人) 열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선포는 그저 이리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집행과 말씀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작금(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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