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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명령만 따르는 종에게도 믿음이 있어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03 조회수1,369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10월 3일 (일) - 연중 제27주일


[오늘의 복음]  루가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까 6)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 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9)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복음산책]  명령만 따르는 종에게도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지나간 3번의 주일동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비유’, ‘약은 청지기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복음으로 들었다.(루가 15-16장) 오늘 연중 제27주일에 듣게 되는 복음은 두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첫째는 믿음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5-6절)이고, 둘째는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말씀(7-10절)이다. 전혀 별개의 두 개의 내용이 한데 묶여있는 것 같은데 하나씩 살펴보고 연결점을 찾아보자.


  그리스의 신화를 접해 본 사람은 ‘판도라의 상자’에 대하여 알 것이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최고의 신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땅으로 보내 처음으로 남자사람과 동물들을 만들게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들에게 이성과 영리함 등 많은 좋은 것들을 선사하고 마지막에 신들만이 사용하는 불을 훔쳐다가 준다. 제우스의 뜻을 거역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 산꼭대기에 매달려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는다. 제우스의 인간에 대한 형벌은 여자사람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아프로디테가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아폴론이 음악을 선사하여 창조된 여자인간이 바로 ‘판도라’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절대로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항아리를 하나 줘서 지상의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는데, 판도라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날로 더해 결국은 항아리를 열고 만다. 순식간에 항아리로부터 시기, 질투, 분노, 미움, 음행, 불목, 싸움, 전쟁, 질병, 죽음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나온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다시 닫았을 때 그 속에 남아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희망뿐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을 곧 미래의 것에 대한 바램이며, 바램은 믿음을 전제한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도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며”(2고린 5,7),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10,9)고 가르쳤다. 그보다 먼저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요구에 따라 가진 재산은 물론 가족들과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은 내렸지만 그 결단에 수행되어야 마음과 몸이 턱없이 부족했다. 사도들에게 스승의 요구는 한 마디로 감당하기에 벅찼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하며 자신들의 부족한 믿음을 고백하고 아울러 ‘믿음을 더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더해 달라는 말은 믿음의 기본은 이미 있다는 말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히 뜻밖이다.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고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고 하셨다. 이와 비슷한 대목에서 마태오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마태 17,20)고 했고, 마르코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산을 바다에 통째로 빠뜨릴 수 있다(마르 11,23)고 했다. 무슨 말인가? 결국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서 가장 작은 씨앗이며, 뽕나무는 그 뿌리가 깊어서 거센 바람에도 뿌리 뽑히지 않고 수백 년을 견딜 수 있다는 나무이다. 그렇다고 2,000년의 교회역사 안에서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고, 산을 옮기거나 바다에 빠뜨린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론은 제자들이 부족하나마 가진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사도들 스스로의 편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대가를 바라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선물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만한 믿음으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서로 윗자리 다툼을 하며(마르 9,33; 마태 18,1; 루가 9,46), 베드로도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마태 19,27) 하며 믿음에 대한 대가를 넌지시 요구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느님과 예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의 자세는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내용인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에 비추어 볼 수 있겠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바로 이런 관계에 있다. 예수님도 ‘파견된 자’로서 ‘파견하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철저한 ‘종의 신분’ 관계로 이해했다. 이 이해는 곧 아들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자유를 선물로 받은 셈이다. 우리는 선사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겠는가.◆[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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