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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03 조회수1,260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 10월 4일 (월)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1182-1226)


  오늘 축일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 페루지아현에 속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날 무렵 이탈리아에 태어난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1225-1274) 함께 스콜라철학의 대가였던 성 보나벤투라(1221-1274)가 오늘의 성인을 두고 한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성인 안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는 또 한번 세상에 드러났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다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고분고분하고 순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다.


  1182년 아시시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편안한 생활을 누리면서 향락을 추구하였고, 기사(騎士)가 될 꿈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25세 때에 전격 회심(回心)하여, 가산을 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나누어주었다. 아버지가 찾아와 말리며 비난하자 입은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등, 재산과 유산과 세속적인 모든 삶을 청산하고 글자 그대로 청빈과 겸손, 이웃사랑을 서약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성인에게 ‘대충’이나 ‘대략’은 없었다. 성인은 철저하고 완전한 청빈생활을 몸으로 실천하기에 이른다. 1209년부터 성인을 따르는 형제들을 모아 교황 이노첸스 3세의 허가를 받아 청빈을 주지(主旨)로 한 ‘작은 형제의 모임’을 설립하였다. 또한 성인을 따르던 성녀 클라라를 권유하여 ‘클라라회’를 설립하고, 다시 속인(俗人) 남녀를 위한 ‘제3회’도 조직하였다. 성인이 회원들에게 요구한 것은 복음에 나타난 철저한 청빈과 십자가 추종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청빈의 목적이 이들에 대한 사랑임을 설파한다. 성인은 스스로 청빈과 사랑, 편력(遍歷)설교와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길 원했다. 1224년 베르나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중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을 받는다.


  1226년 엄청난 고통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성인은 자신이 지어 만든 ‘태양의 노래’를 불렀고, 장상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면 자기의 옷을 벗겨 갖도록 하고, 주님을 본받아 땅 위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 운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성인은 1226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고 1232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프란치스코를 성인반열에 올렸다. 성인 프란치스코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또한 스페인의 도미니코(1170-1221) 성인과 함께 서방 수도생활의 일대 전환기를 이루는 탁발(托鉢)수도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탁발수도회는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내리신 엄격한 여장규칙(마태 10,8-10)을 그대로 따르려 하는 수도회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성인이 철저한 복음정신에 의한 스스로의 삶이 가져온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오늘의 복음]  루가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진정한 이웃사랑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25-37),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가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가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다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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