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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관상과 활동의 적극적인 조화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05 조회수1,182 추천수15 반대(0) 신고
 

◎ 2004년 10월 5일 (화)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10,38-42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38)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복음산책]  관상과 활동의 적극적인 조화


  어제는 우리가 루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어떤 율법교사 스스로가 뱉어낸 대답이었다.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는 반문에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예수님에 대한 행동양식을 통하여 삶에 있어서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강 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에 살았다고 한다.(요한 11,1) 그런데 루가가 말하는 ‘어떤 마을’이 베다니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중이긴 하지만, 복음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아직 예리고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루가 18,35) 루가에게 있어서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루가는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한 가족에게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야훼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 셋을 뛰어나가 맞으면서 손님으로 들어와 줄 것을 청한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극진한 정성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그러나 곧 야훼의 손님들은 그에게 이사악의 출생소식을 선물로 준다.(창세 18,1-10) 주인이 오히려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된 셈이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진다.


  통상 집에 손님이 오면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데 바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와중에 손님 곁에서 대화를 꾸려나가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로서 같은 자매끼리 마르타처럼 누구는 일하고 마리아처럼 누구는 일하지 않고 손님 곁에서 노닥거린다면 자매지간에 꼴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타도 자신의 불평을 주님께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마르타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시지만, 당신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통하여 자신을 ‘베푸는 자’로 부각시키신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은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로서 바로 말씀이신 당신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마태 20,28)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사실상 없다. 그렇다고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별개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상이 없는 행동은 생각이 없는 행동과도 같기 때문에 임의(任意)나 무작위(無作爲)가 될 수도 있으며, 행동을 동행하지 않는 관상은 공상(空想)이나 허상(虛像)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소극적인 조화보다는 적극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먼저 관상하는 것이며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행동(行動)하고 사고(思考)하는 것보다 먼저 사고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먼저 관상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 말씀(요한 1,3-4)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을 ‘베푸는 자’로 맞이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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