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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속한 나 자신.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09 조회수1,302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10월10일(일) - 연중 제28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가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14)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16)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19)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속한 나 자신.


철저한 분업과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현대사회의 종합경제 안에서 상품의 교환과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단연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이다. 돈은 유통경제와 시장경제의 매개적 수단이며, 돈은 그 자체로도 증대(增大)된다. 누구나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그 가격만큼 정확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의술(醫術)을 구매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삶의 거의 대부분은 돈과 함께 전개된다. 현대인은 돈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명백한 이론이나 정확한 계산으로 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여기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짜, 또는 선물이다. 선물은 이론이나 계산의 선을 무너뜨린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계산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그리 걸맞지 않지만, 선물에는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관계에서,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감사는 하나의 덕(德)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와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거나, 하느님을 우리와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덕을 발견한다. 그들의 덕이 우리들의 것보다 크게 발견되거나 느껴진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신 예수께서 따라오는 군중들에게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적이 있다.(루가 7,2-10)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가진 큰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감탄은 복음의 단지 몇 군데서 발견될 뿐이지만,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1-28)이나 시로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마르 7,24-30)이 그랬고, 루가복음사가 고유의 편집에 속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5-37)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 예수께 돌아온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17,11-19)이 그렇다. 오늘 복음은 단연 그 진수(眞髓)를 이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받자,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당시대 이방인이었던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어느 과부만을 구제한 일(1열왕 17,7-16)과, 엘리사가 수많은 나병환자들 중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었다(2열왕 5,1-14)는 이야기를 통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의 구원활동이 이방인들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고향 사람들의 화를 불러 일으켜 벼랑 끝에서 객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셨다.(루가 4,16-30) 아무튼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연민의 정과 그들 믿음에 대한 감탄은 자신의 지상적 사명과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복음선포 가운데 아주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척했고, 초대교회 또한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에 다분히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에 열거한 대목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내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보다 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서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어느 누가 되었든 간에 하느님 앞에 자신의 참된 믿음을 발원(發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 감사할 줄 아는 자이다. 감사할 줄 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처지가 좋건 나쁘건 언제나 감사할 줄 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19절)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그 진수를 보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마을 안에 살지 못하고 어귀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였다. 레위기 13장은 사람에게 생긴 문둥병이 그 자체뿐 아니라 환자까지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진지에서 격리시켜 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부정을 선언하는 보건소 소장은 바로 사제들이다. 사제들은 이들의 병이 전염될 위험 때문이 아니라 경신적 의미에서 ‘부정 탄다’는 이유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료와 가족으로부터의 격리요,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이란 죽음에 부쳐진 실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기적을 베푼다는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께 나아가 멀찍이 서서나마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절규한다. 이 절규에는 표현되지 않은 ‘감사’가 들어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재적일 뿐이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14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율법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 말씀 안에 이미 기적의 힘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열 사람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었다면, 자기들이 나을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거기서 사생결단을 낼 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해진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믿음에 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그길로 계속 달려가 사제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임으로써 ‘부정에서 정함’을 인정받고, 제단에 희생제물을 올린 다음, 그동안의 격리와 추방으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만회하는 데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만은 정신이 있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7-19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분명히 열 사람이 다 처음에 믿음을 가졌었는데, 막판에 와서 왜 한 명만이 믿음을 가졌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은 9명의 믿음과 1명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믿음의 구별이다. 이는 곧 감사의 구별이기도 하다. 9명의 믿음은 필요와 욕구(欲求)의 질서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원의(願意)의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육체의 치유만으로 기뻐하는 반쪽의 믿음이요, 후자는 ‘무상’으로 주어진 치유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믿음이다. 즉, 후자의 경우가 제대로 된 감사인 셈이다. 9명의 믿음은 필요의 성취에 머물러 버린 그 다음 단계가 없는 믿음이며, 예수께로 돌아온 자의 믿음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요 감사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집중시킬 때 얻어지는 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대부분 기적을 행하실 때 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가 일어났고, 장님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돌아온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해 주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본질적인 치유의 힘이 너 자신 안에 있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이런 힘이 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힘이 하느님의 현존임을 망각하고 순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즉 무상으로 와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스스로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실제로 서 있고, 살아 있고, 참 삶을 살고 있는 이곳뿐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 기적의 외적인 모습에 맴돌지 않고, 그 기적의 내적인 원동력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거기에 하느님은 자신의 신적 현존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예수님께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병도, 불치의 병도 아니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천재지변도 아니다. 문제는 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바로 나 자신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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