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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16 조회수1,333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10월17일(일) - 연중 제29주일 (다해)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없음)


[오늘의 복음]  루가 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 부르짖을 제 올바르게 판결해 주신다.>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복음산책]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다.


  우리는 지난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적 치유의 은혜를 입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되돌아 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아름답고도 모범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짜’와도 같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당한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자세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습관은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는 “감사합니다.” 하고 자주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인색한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는 지나가는 개도 다 안다. 다소 표면적이긴 하지만, 상점을 드나들 때나 전시회를 들어설 때 한결같은 안내원들의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라는 인사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는 우리들이 아닌가? 하루 종일 시커먼 매연을 마셔가며 고속도로나 유료도로 톨게이트에서 “반갑습니다. 안전운행 하십시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는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라는 단 두 마디의 말도 못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들이 직업상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들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무뚝뚝하게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건네 오는 인사에 한 마디 감사의 응답을 즉각 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족한 습관을 탓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나병의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곳, 즉 회당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고쳐준 예수께로 돌아왔다. 그렇다. 근본적으로 감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살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은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 여기에 오늘 예수께서 좀더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가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가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유의 요지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만한 재판관이 억울함을 당한 과부의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목적은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거만한 재판관이 수락했다’는 데 있다기보다 기도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 복음이 인자(人子)의 재림(再臨)에 관한 대목(17,20-37) 바로 다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기도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종말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종말을 대비한 유비무환은 한 가지 일에만 감사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늘 감사하며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도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11,1-4)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5-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 감사할 줄 모르고 거만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늘 감사하며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감사와 기도뿐이다. 예수께서도 항상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로도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도하기를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마태 11,25; 14,19; 15,36; 26,27; 마르 6,41; 8,6; 14,23; 루가 9,16; 10,21; 22,19; 24,30; 요한 6,23; 11,41; 사도 27,35; 로마 1,8; 1고린 11,24-25; 14,16-18; 2고린 9,15; 에페 1,16; 5,20; 필립 1,3; 4,6; 골로 1,3; 3,17; 4,2; 1데살 5,18; 1디모 2,1; 2디모 3,2; 필레 1,4; 묵시 7,12; 11,17 등)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이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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