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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 어디 있느냐?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4 조회수1,470 추천수10 반대(0) 신고



  성서 전체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첫 행복은 인간의 창조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보시니 좋더라”라는 반복되는 말씀은 
그저 앞에 펼쳐진 풍경에 대한 단순한 기분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데 대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발견한데 대한 희열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의 대견함, 보람, 존재의 의미를 찾듯이 
하느님 역시 우주, 천지 만물, 특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러한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인간을 빚어낸 그분이 느낀 것은 숨을 턱! 막는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따라 빚어놓은 인간을 대하고 등골에 오싹 내리 흐르는 기쁨을 느낀 하느님은 바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손뼉을 치며 기뻐합니다. 이 기쁨을 제대로 맛본 이후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운명을 겁니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과 함께 할 때라야 행복이 무엇인지를 체험합니다. 인간이 없는 하느님은 배우 없는 연출가입니다. 인간이 없는 외로움을 하느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분신이요 삶의 의미이고 존재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창조라는 거대한 작업을 펼치신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을 ‘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 무한하게 펼쳐진 우주의 작업장에서 피곤도 잊고 끈질기게 작업해온 까닭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주는 인간이 흡족하도록 무진 신경을 써서 마련하신 하느님의 신방입니다. 그분은 이 신방을 구석구석 쓸고 닦아 아름답게 꾸며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품을 떠나 멀리 멀리 벗어나가기만 합니다.
사람! 사람이야말로 그분 질투의 대상이요,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며 신음하는 그분 상사병의 원인입니다.


당신 품을 떠나는 사람들을 찾고 또 찾고 그리고도 또 찾아 헤매는 하느님. 포기해야 하리라는 순간에도 “한번만 더” 하면서 마음을 고쳐 잡는 하느님입니다. 그런 장면이 성서 구석구석에서 묻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숲 속에 숨어버린 개미 한 마리를 찾듯 그분은 이리저리 찾아 헤매십니다. “사람아, 너 어디 있니?” 그 분의 음성이 동산을 울렸습니다. 그 음성에는 사랑했던 자를 잃어버린 분의 고통이 실려 있었습니다.

눈이 밝아져 모든 것을 다 알아야겠다고, 하느님처럼 높아지고 싶다고 저마다의 탑을 쌓고 담을 높이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점점 고립되어가고 병들어갑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니?”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폭력 때문에 형제들이 다 죽어갑니다. "나에게 손찌검이라도 하는 날이면 일흔일곱배로 갚아주겠다"는 라멕의 노래는 이제 우리들 모두의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할 일 많은 터에 밤낮 싸움질로 허비하는 안타까운 삶에 그 분의 애가 닳습니다. "토마야 너는 어딜 갔었니?”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예수님의 가슴에는 한없는 서러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에게, 민족과 종족들마다에게 그리고 각 세대들마다에게 묻고 실망했던 하느님입니다.

"너 어디 있니?" 이 질문은 물론 어느 장소에 있는지를 묻는 것일 뿐 아니라 네가 지금 네 인생 전체에서 어디만큼 와 있는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지금 무얼하며 살아가고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 어디 있니?”



이룰 수도 없는 사랑의 꿈으로 결국 괴로워하는 것은 분명 그분의 모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이 없는 하느님은 까닭 없이 공허하고 더 아플 뿐 달리 수가 없습니다.


인간 때문에 고독한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도 인간을 향한 한 분 하느님의 삼중적 사랑고백입니다. 성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움의 수난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항상 고난을 당하는 사랑이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때가 많습니다. 아니 실감을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알지만 귀찮아서 귀찮아서 바로 문턱에까지 온 그분에게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비극과 모순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을 붙잡고 사랑얘기로 들려주는 하느님의 화해의지의 전부이고 그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애인입니다. 하느님의 꿈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그리움 자체이며 그분 사랑의 목표”입니다. 성서는 당신 작품에 소름끼쳤고 인간에게 운명을 걸리라 다짐하던 하느님이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 인간을 닮다 못해 - 아예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에 미쳐 거꾸로 되어 버린 분, 이성을 잃고 집을 나오고만 분, 그래서 하늘나라의 탕자가 된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그 길 밖에는 없다고 천국을 버리고 곤욕 속에 진창이 되어 기어코 죽고 마는 예수님의 길은 미칠 것 같은 사랑 때문에 빚어진 하느님의 운명이었습니다. 보장된 낙원을 마다하고 어쩔 수 없이 비극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고 마는 하느님. 초라한 모습, 누더기도 걸치지 못한 십자가상의 아들은 하느님의 잃어버린 자신이었습니다. 하느님도 홀로는 너무나 외롭고 서러워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고독은 원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지 못할 때 찾아옵니다. 그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인해 하늘나라로부터 가출하여 인간에게로 뛰어오는 하느님. 그 발걸음이 하도 급하여 위태롭기만 합니다. 온 성서가 그것을 전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그리워 너무 급히 뛰어오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신 하느님.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데도 그냥 뛰어오다 봉변을 당하고 마는 무모한 그분 사랑을 성서는 전해줍니다.

"너 사람아, 어디 있느냐?" 주님이 자꾸 부르십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이 영상물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10월 24일 정하상바오로 후원회원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으로 위탁받아서 만들어본 것입니다. 배영호 신부님의 글을 "너 어디 있느냐?"는 주제에 맞춰 제가 각색해 본 것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글에 누가 되지 않았나 걱정스럽습니다. ^^ 최부제님이 이 영상을 다시 기술적으로 편집하셨고 신학생들이 더 많은 영상물을 삽입하였고, 나레이션을 집어넣어서 너무나 훌륭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성서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잘 가르쳐주는 글이라고 보아 여기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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