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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 200회 특집 ㅡ 작품 하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31 조회수1,173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4년10월31일 연중 제31주일 ㅡ지혜서 11,22-12,2;데살로니카2서1,11-2,2;루가19,1-10ㅡ

 

      200회 특집 ㅡ 작품 하나(수필)

 

 

                           53이라는 숫자에 대한 그리운

       

                                                               이순의


어려서 마을에 초상이 날 때면 남의 집 문상 길에 동구 밖에서 부터 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곡이 나오는 것이 아니야!

모두가 다 자기설음 때문에 곡이 터지는 것이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피해 나갔다. 너무나 이른 나이에 명을 재촉하신 친정아버지 생각에 상주에게도 없는 슬픔이 엄습해왔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별의 슬픔을 애석해 하기보다는 천수를 다 하신 분에 대하여 감사하는 호상가였던 것이다. 친정집에 일정에도 없는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큰언니네 집에 가시고 계시지 않았다.

 

여백의 시간이 흐른 뒤에 생면부지의 장례식장으로 큰오빠내외가 나오셨다. 만남의 이면에는 조심스러움도 배가 되었다. 큰오빠의 자리는 늘 막중한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 날도 반가움은 짧고 간단했다. 그리고 계획은 타의와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아버지한테 들렸다 가자.”

함께 간 일행들에 섞여 되돌아 갈 심산이었다. 아버지를 보러 담양에 까지 간다는 마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금방 남의 장례식장에서 상주들도 하지 않은 곡을 대신할 뻔 했는데도 아버지를 보러 갈 이유는 나중이었다. 어서 돌아가 내 새끼들과 살고자 하는 의욕이 먼저였다. 소용없는 딸자식의 몽매함을 들킨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 미안함을 펼쳐 놓을 수는 없었다.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자기의 섧음이었다. 죄송하고 싶어서 죄송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질곡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형제들에게는 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더 아팠다. 내 마음과 다른 근심들을 실어 드려야 하는 빈궁한 생활이 몹시도 서글펐다. 나의 작은 소란으로 운전을 하시던 큰오빠의 손이 슬쩍슬쩍 얼굴로 가고 있었다.

백골이 분토되어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항아리에 담아 상자만한 단 칸 방에 모셔두고 맏아들이라는 끈으로 매듭을 이어 저렇게 살고 있었다. 세상 풍파의 숱한 날들이 겹칠 때면 그 흙에 기대어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보러 가는 길은 서글픔의 눈물바다였다.

 

아버지께서 일찍 가시고 막내라는 섭섭한 섧음으로 곡을 하는 동생과, 맏이라는 벅찬 섧음으로 곡을 하는 큰 오빠의 동행 길이었다. 남매이면서도 서로에게 주어진 삶의 생경한 차이를 좁히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때로는 시집이라는 굴레를 살아가는 새언니의 입장을 더 공감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승용차는 아버지를 향한 애환을 가득 싣고 유난히도 묘 봉이 많은 담양고을을 굽이 돌아갔다. 오랜만에 데려온 막내 동생을 아버지께서 잘 보시도록 해 드리고 싶으신 것이다. 큰오빠의 몸가짐이 분주해지셨다. 

 

그런데 오빠가 움직일 때 마다 그 뒷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분명하게 목격되는 것이 있었다. 저 몸짓은 눈에 박히도록 확연한 기억이 아니던가?!

휘어진 어깨선이며 꼭 그 만큼 굽혀진 등선도 그렇고, 향을 피우시려고 마련하시는 손놀림은 더 역력하다. 틀림이 없다. 생김이 외탁을 하셔서 저렇게까지 닮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 했는데, 마지막으로 심어둔 모습이 그대로다. 그러고 보니 올해 큰오빠의 나이가 아버지께서 세상을 저버린 동갑이 되어있다.

 

53세!

그 쉰셋이라는 숫자가 떠오르는 순간 온 전신에 서늘한 소름이 감돌았다. 이 시간 이 후의 큰오빠의 모습은 마저 살지 못 하고 가신 아버지의 남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큰 오빠의 저런 모습으로 세월을 접어 가셨을 것이라는 여운이 사무치게 아까웠다.

사방으로 두 뼘이 될까 말까한 아버지의 방문 앞에 섰다.

눈물이 콧물이 되고 콧물이 눈물이 되고!

연령을 위한 기도문들이 눈에 읽히지 않았다. 끊어지다가 이어지고 틀렸다가 바르게 되돌아가는 오빠의 거친 기도문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새삼 큰오빠가 아버지 보다는 오래오래 무병장수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절박해졌다. 죽은 아버지께 살아있는 자식의 이기심을 청하였다.

 

노구의 어머니로 인한 염려스러운 걱정들을 덜어주시라고,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맏자식 노릇을 해 보았더니 산다는 것이 크나큰 짐이었더라는......!

죄 많은 딸자식의 일생이 애절한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에 낮은 음성이 영혼들의 아파트 사이를 스쳐와 격해진 감정을 차단했다.

“그만 가자.”

돌아보니 함께 기도문을 낭독하시던 자리가 허망하다.

저승을 사는 사람들의 아파트에는 냉방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을 사는 사람은 눈물이 범벅에 땀이 범벅이었다. 죽은 아버지께는 변변한 인사말도 남기지 못 하고 오빠가 기다리신다는 조바심에 후줄근히 젖은 걸음을 재촉했다. 현관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영정이 모니터에 떠올라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또렷하게 반가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네.”

스쳐보시는 새언니께 마음이 조심스러웠다.

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새언니와의 동거를 벗어나 시집가던 날에는 누가 내 손을 잡아주실지 걱정스러웠다.

큰아버지께서 계시기는 했지만 동생이 죽었다고 해서 질녀에게 까지 잔정을 쏟으실 이유가 없었다. 자식들이 많은데다가 지역의 유지였고 갑부였기 때문에 동생의 맏이도 아닌 끄트머리 여식에게 신경이 갈 만큼 한가롭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함께 살아온 큰오빠의 손이 아버지의 손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새언니와 함께 매일 아침을 열고, 해 주시는 밥을 먹고, 밤이면 같은 공간에서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큰오빠가 아버지를 대신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꼭 큰오빠의 손을 잡고 시집을 가고 싶었다.

 

결혼식 날이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박수소리가 퍼지고 신부입장이라는 사회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웅성거리는 사람은 많았으나 신부의 손을 잡으러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아버지 계신께 큰아버지한테 잡으라고 해!”

어디선가 급한 대로 들려 온 소리였다.

방금 곁에서 머물던 큰오빠는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술렁이는 식장 안에서 다급해진 사람은 큰아버지였다. 하얀 면장갑도 끼지 못 하시고 맨살로 새색시의 손을 잡으셨다.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떠넘기는 것 같은 신부입장이 되어버렸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자리는 비우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비웠다고 하더라도 돌아오실 때까지 혼인식은 진행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오라버니와 다른 아버지의 자리였다.

신랑이 기다리는 곳은 바라보이는 지척이었지만 마음이 걸어가는 곳은 아득한 천리 길이었다. 쏟아지는 원인불명의 눈물바다 위에서 시집을 갔다. 그 아쉬움이 오랜 세월을 담고 가는 체념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 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세상은 섭섭하여도 섭섭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푸념하는 것을 중단했으며, 외로워도 외롭다 하지 말고, 슬프면 슬픈 대로, 그저 혼자서 하염없이 울어서 삭히는 것이었다. 폭폭 하다는 눈물 한 방울에 그리운 아버지의 얼굴이 위로였고, 목구멍에 고인 쓴 물 한 모금에 보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이 안주로 넘어갔다. 돌아갈 수 없는 본향은 아버지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계시는 큰오빠는 더 이상 오라버니가 아닌 아버지의 모습으로 재촉을 하신다. 어서 집으로 가자고 재촉을 하신다.

53이라는 숫자의 그리움은 53이라는 숫자에 이르신 큰오빠가 비로소 쉰세 살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딸아이의 결혼식에 직장 동료들이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받더라도 아버지가 되신 오빠는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직접 마중을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을 살고, 경험을 배우며, 근심을 쌓고, 고비를 넘어, 인생이라는 여정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헌신의 정류장에서 떨궈야 할 찰라와 싣고 가야할 정담을 식별하는 혜안이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삶의 과정이 사람의 뜻과 같을 수 있었다면 망설임이라는 한 발짝의 겸손한 보폭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체념들을 그리운 숫자에 모아 삼켜 살지 않았더라면 큰오빠의 가슴에 서운함 보다 더한 바늘을 꽂았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소망만으로도 그 위로를 받기에 충분하다.

휘어진 어깨선이며 꼭 그 만큼 굽어진 등을 숙여 손으로 심지를 가리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셨다. 영락없는 아버지다. 선명하다 못해 혼령인 듯 닮아 거기에 서 계신다. 다시 돌아가 시집가는 날에 큰오빠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어 살아가실 모습은 내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나머지의 온정을 저런 모습으로 쏟아주셨을 것이라는 막연한 염원을 소유하고도 부족함이 없다.

상주들도 서럽지 않은 호상가에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안타까워하며 서러워한 공로였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내 섧음에 통곡을 삼켜 담은 은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야버스가 떠날 때까지 대합실 유리창 앞에 쉰세 살의 아버지가 물끄러미 서서 어두운 시야를 바라보셨다. 시집갔으면 잘 참고 사는 거라고 손짓을 하신다. 그 옆에 새언니가 서있다. 어머니는 큰언니네 집에 가시고 없었다.   

그렇게 그리운 53이라는 숫자의 보퉁이를 가슴에 품어않고 마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ㅡ끝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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