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01) 200회 특집 ㅡ 작품 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31 조회수1,19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4년10월31일 연중 제31주일 ㅡ지혜서 11,22-12,2;데살로니카2서1,11-2,2;루가19,1-10ㅡ

        

             200회 특집 ㅡ 작품 둘(수필)

 

               간   장

                     

                                           이순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구름기둥이 하늘로 오르고 하늘 위에서는 버섯처럼 하얗게 퍼져갔다. 집안 전체가 그늘이 져 버리는 음침한 두려움이었다. 소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 하고 추녀 밑의 토방위에 서서 두려움에 떨었다. 

검은 간장이 하얀 거품이 되어 뒤뜰 전체로 흩어졌다. 질컥거리는 뒷마당에 내려서면 마치 늪에 숨은 검은 손이 소녀의 발목을 잡고 육신을 통째로 빨아버릴 것 같았다. 이미 장독대는 수라장이었다. 깨진 항아리의 파편들과 염기 짙은 수증기는 아직 피어나지 못한 소녀의 살갗을 애이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엄청난 굉음을 냈던 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언니가 없었다. 모든 것이 눈 깜박 할 사이에 터져버린 일이었다.

 

작은언니가 여름방학이 되어 돌아왔다.

작은언니는 늘 바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에 가뿐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날도 여름장마 뒤의 장독대에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빗자루로 문지르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고 조바심을 내며 식모들을 달달 볶았다. 일꾼들이 많아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기에도 바빠 죽을 지경이라고 부엌에서는 부엌에서 대로 불평들이 새어 나왔다.

소녀가 볼 적에는 작은언니의 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소녀처럼 작은 체구는 한 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항아리부터 올망졸망 귀여운 양념단지까지 즐비한 사이사이로 물오른 이끼들이 얼룩져 덮고 있다.

작은언니는 어머니께 이제라도 장독대 청소를 시키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다. 방학이 되기 전에 청결하게 해 놓지 않았다고 징징거렸다. 그렇지만 늘 바쁘신 어머니는 자잘한 꺼리들을 일일이 간섭하지 못하고 동분서주 하셨다.

 

눈치 빠른 부엌데기들은 들은 체 말은 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고등학생인 작은언니가 그 성화를 꺾지 못하고 장독대 청소에 나섰다. 어머니도 식모아줌마들도 눈에 쌍불을 켜고 말렸지만 그렇다고 까실까실한 작은언니의 성깔을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허락을 하시고 말았다. 항아리는 절대로 건들지 마라는 당부와 바닥만 슬쩍슬쩍 문질러 이끼만 벗겨내야 한다고 이르셨다.

소녀는 뒤뜰의 장독대에 선 작은언니가 대단히 커 보였다. 처마 밑 마당가에 서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한편으로는 푸른 이끼가 덮이도록 청소하지 않은 부엌식구들이 보는 것 같아서 으쓱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절대로 항아리를 옮기지 말라는 어머니의 엄명이 계셨는데도 작은언니는 아기자기한 단지들의 자리를 바꿔가며 시멘트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짝은언니야!

엄마한테 일르러 간다. 잉?”

소녀의 걱정에 작은 언니는 발끈하여 눈이 있으면 자세히 보라고 윽박질렀다. 항아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단지들만 이쪽저쪽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호언하였다. 더구나 어머니께 이르기만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처음에는 작은 단지들만의 자리이동이 분명했다. 그러나 장독대의 변두리를 벗어나 중앙으로 옮겨 갈수록 항아리의 크기는 위험수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독대에는 어머니께서 아끼시는 항아리가 세 개가 있다.

주조장을 하시는 큰어머니께 사정사정을 하여 술밥 삭히는 술독 세 개를 구해다 놓으셨다. 주조장 집 큰어머니도 부럽지 않다고 하실 만큼 그렇게 크고 배부른 항아리였다. 소녀네 마을에서는 주조장을 하시는 큰어머니 집을 제외하고는 장정 서넛은 들어가고도 남을 항아리가 소녀의 집에만 있게 된 것이다.

 

늘 일꾼들을 끌이고 살았던 소녀의 어머니는 많고 많은 간장을 한곳에 가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술독처럼 큰 항아리가 없었으므로 이 항아리 저 항아리에 분산을 시켜놓았다. 남의 손을 빌려서 간 것들을 관리하는 소녀네 집은 항아리마다 장맛이 달랐다. 간장은 그 가정의 음식 맛을 좌우한다는데 담겨진 그릇마다 맛이 다른 이유를 어머니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큰어머니께 여러 해를 졸라서 술독 세 개를 구하신 것이다.

간장을 커다란 가마솥에 끓이고 끓여서 그렇게 크고 옹골찬 항아리에 가득가득 채우셨다. 그날 새끼손가락에 간장을 찍어서 빨던 어머니의 모습은 달여진 장맛처럼 달콤했다. 그런데 작은언니가 담장 밑에 나란히 서 있는 그 항아리 곁으로 근접하고 있다.

 

저 항아리가 깨지면 다시는 구할 수 없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장독대의 가장 깊숙한 곳에 터를 마련해주었다. 그 앞으로는 졸병의 항아리들로 크기를 달리하며 호위병을 세웠다. 그만큼 최후방에 자리를 잡아 드린 것이다. 작은언니는 그렇게 많은 군졸들을 하나하나 끌어내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마지막 병사들과 장교들까지 끌어내고 있었다.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간장항아리 깨진다. 잉?”

어린 소녀가 보기에도 더 이상의 깔끔함은 멈추어야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작은언니는 어림없이 큰 간장항아리를 어떻게 옮기느냐고 큰 소리를 쳤다. 동생의 충고를 잘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 놓인 항아리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도 헐어내지 않아서 가득 찬 된장항아리였다. 무게가 무게인 만큼 뚜껑을 열어 한 쪽에 비켜두고 아가리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항아리 바닥의 모서리가 구를 만큼 비스듬히 뉘어 세우고 살금살금 돌려서 간신히 자리를 바꾸었다. 뚜껑을 덮고 빗자루로 장독대 바닥을 빡빡빡 문질러 이끼를 걷었다. 물을 퍼서 쫙쫙 뿌리는 작은언니를 보면서 소녀는 겨우 한숨을 놓았다. 하지만 작은언니는 다시 제 자리로 된장항아리를 옮기려고 한다. 무거우니까 그냥 그 자리에 두라고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작은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왔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늘 밑에 서서 잔소리만 한다고 소녀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장독대가 단정하려면 항아리 배열을 잘 해야 한다고 훈계까지 했다. 자신감 넘치는 작은언니는 된장항아리의 뚜껑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가리를 꼭 틀어잡은 다음에 비스듬히 뉘어 세워 바닥의 모서리가 잘 굴러가도록 조심조심 돌리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소녀는 아슬아슬한 항아리만 유심히 쳐다보았다. 된장항아리는 작은언니의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잘 돌고 돌았다. 대장인 간장항아리 옆으로 바로서야 한다.

 

그런데 천천히 천천히 돌아가던 된장항아리의 모서리가 그렇게 뚱뚱한 간장항아리의 아랫도리를 살짝 아주 사~알짝 스치고 있었다.

“빠앙!”

“촤아악~~!"

원자폭탄의 구름을 하고 간장은 하늘로 올라갔다. 뒷마당은 간장으로 홍수가 되어 발을 내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구름기둥은 사라져버렸다.

끈끈한 간 기운이 뒤뜰의 공기를 점령하고 있었다. 숨구멍의 혈액이 삼투압으로 역류되는 따가움을 견디어야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부엌데기들과 놀라서 달려온 일꾼들 틈바구니에서 새파랗게 질려버린 어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고 계셨다.

“일 년 농사를 망해뿌러서 어쭈꼬 산다냐?”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운 이웃들이 찾아왔다.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보았노라고 하며 무슨 변고가 생겼는지 안부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모두들 웅성거릴 뿐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어머니는 작은언니를 찾지 않았다. 찾아 나선 사람은 소녀뿐이었다. 모두들 어머니의 심기를 살피느라고 쉬쉬하며 물러났다. 부엌데기들만이 분주하게 깨진 항아리의 파편들을 수거하느라고 바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간장 없이 살아갈 일이 아득하였다. 삼복더위에 메주를 띄워 봐야 썩어서 구더기의 먹을거리가 될게 훤했다. 저렇게 많은 간장을 조미료 맛이 진한 왜간장으로 사서 먹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소녀가 찾지 못한 작은언니를 어머니는 금세 찾아오셨지만 별다른 야단이나 꾸지람은 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 안심이 되기도 하였지만 하늘로 땅으로 사라져버린 간장을 마련해야 할 근심에 기력을 소진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동이를 머리에 이고 간장을 구걸하러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 했다.

소녀는 작은 주전자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어머니께서 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집집마다 들려서 똑 같은 말을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우리 작은 딸년이 간장항아리를 깨부러서 일꾼은 많고 여름할라 된디다가.....! 크나큰 집이서 간장 없이는 하루도 못 견딜 것인디.....! 간장 쪼끔 얻으러 나왔어라우. 그랑께 한바가지도 좋고, 한보시기도 좋고, 주는 대로 받을랑께 쪼끔썩만 생각해 주씨오. 우리 집 간장항아리를 채워 줄만헌 집이 어디가 있것소 마는 티끌모아 태산인께 이러고 댕기제라 잉.”

그렇게 해서 동이로 한 동이를 주시는 집도 있었고, 바가지로 한 바가지를 주시기도 했으며, 보시기로 한 보시기뿐이어서 소녀의 주전자에 부어주시는 분도 계셨다. 여러 날 동안 마을의 한 집도 빼지 않고 간장을 얻으러 어머니를 따라 다녔다.

마을 전체를 돌아서 얻어온 간장들이 모여 모여서 빈 술독의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흡족해하셨다. 오히려 운이 떨어지게 되면 여러 집에서 모아온 장맛이 금방 상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를 서두르셨다. 장독대 곁으로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펴 꼬박 이틀을 달이고 식히기를 반복했다. 그 때서야 어머니는 여름의 땀을 훔치셨다.

 

가난한 사람의 간장 한 보시기가 간장이 많아서 동이로 줄 수 있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장한 인심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것을 터득했을 때는 소녀의 나이가 어머니의 나이를 맞고 있었다. 그 간장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늠할 줄 알게 되고, 마을사람들의 성의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를 알아간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습득한 보속이었다.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 중년의 소녀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던 것을 여쭈어 보았다.

“엄마! 그 때 작은언니가 어디에 숨었었어요?”

                                  ㅡ끝ㅡ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