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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인이 되는 것을 보고야 말리라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9 조회수869 추천수4 반대(0) 신고
 
 경향잡지 2002년 3월호 목차경향잡지 2002년 3월호 목차
   

젖빛 안개 자욱한 초남이 들녘에서

 - 전주교구 초남이 성지를 찾아 -

어머님, 문안 아뢰옵니다.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는 날,
우리 내외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매같이 살매,
그 사이에 혹독한 유감이 몇 번 있어
거의 열 번이나 무너질 뻔하였사오나
공경하올 성혈 공로로 악마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머님께서 이 일로 걱정하실까 함이오니
이 글월을 받으실 때 소녀의 얼굴을 대하심같이 받으시옵소서.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됨이 옳소이다.
할 말씀 많사오나 더 쓸 수 없사와 이만 그치옵니다.
- 루갈다의 옥중 편지에서


   집은 헐려 못이 되었어도 얼은 살아
   초남이 성지 ● 유항검의 생가 터이며 동정부부의 수도장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이라 부르는 이 마을은 1784년 영세하여 호남의 첫 사도로 활약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고향이자 전라도 천주교의 발상지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찹쌀 배미 쉰세 마지기”라는 말이 전해오는 너른 들녘이 바라보이는 길가에 어깨 높이의 담을 두른 작은 생가 터가 있다.
   손님 접대와 명절 음식에 쓸 찰벼만 해도 쉰세 마지기를 지을 정도로 호남의 대부호였던 유항검은, 가성직제도 당시 신부로 뽑힐 만큼 덕망도 높았다. 그는 이렇게 많은 재산과 후덕함으로 손님들과 식솔들에게 전교를 하였다. 마을 앞 논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가 은밀히 교리를 가르치던 ‘정지시암’(부엌샘)이라 부르는 외진 곳이 있다.
   초남이는 1797년 혼인한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가 4년 동안 동정생활을 한 수도장(修道場)이기도 하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사라지고 없어도 동정부부의 기상처럼 푸른 대숲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마을의 옛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평화로운 이 마을에도 1801년 신유년 박해가 몰아쳐 9월 17일 유항검은 대역부도 죄로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10월 9일에는 큰아들 유중철 요한이 순교하였고, 12월 28일에는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와 조카 유중성 마태오가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의 칼을 받았다.
   유항검 가족의 보금자리는 파가저택(破家醻澤, 곧 역적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터는 파서 물을 대어 못을 만드는 형벌에 처해졌다. 남은 노복과 친지들은 유항검 가족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건너편 재남리 바우배기 남의 땅에 가매장하였는데(앞쪽 사진에 보이는 밭), 1914년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전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치명자산 꼭대기 무덤으로 옮겨 모셨다.
   1987년 전주교구는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초남이를 성역화하였으며, 2000년 1월 14일 초대 성지 담당 신부로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하였다. 흉가 터를 가리키며 천주학은 절대 하지 말라던 당부가 이어져온 이 마을에도 이제는 신자가 생겨나고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누이야, 우리 천당에서 서로 만나자
   피묻은 쌍백합 ● 동정부부 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

   “유 요한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장남으로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깊었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께서 이곳 초남이를 방문했을 때 요한은 주 신부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여 한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고백하였다.
   한편 왕가 집안의 딸로 178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루갈다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첫영성체를 할 때 한평생 성모 마리아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한 뜻을 주 신부님에게 알렸다. 주 신부님께서는 이들의 뜻을 면밀히 살펴본 뒤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결혼의 형식을 취하고 서로 남매처럼 살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초남이 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짤막한 소개 자료말고도 성지에서 구할 수 있는 동정부부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전기 「피묻은 쌍백합」(1958년, 김구정 지음)을 꼭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불쌍하신 우리 오라버님! 죽으셨나이까? 살으셨나이까?” “사랑하온 벗 내 남편 요안… 어찌 잠시인들 잊히리까?”로 시작하여 “죽는 새의 소리는 슬프고, 죽는 사람의 말은 착하다.”며 당부로 끝내는 루갈다의 옥중 편지는 절절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소제의 시부모를 모시고 한 가지로 살아보니, 아무것도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할 것이 적고, 모든 일을 부모의 마음에 합하도록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더이다.” “나 덕없는 사람이 감히 남을 경계하였사오니, 길가에 섰는 장승이 남의 길을 가리키고, 저는 가지 못하는 격이오이다.”
   목이 졸려 순교한 요한의 옷섶에서 나온 화답 또한 가슴 뭉클하다.
   “누이야! 내가 너를 권면하고 위로하노니, 우리 천당에서 서로 만나자.”

   신혼여행 갔다가 갈라져 돌아오고, “일단 살아보고 결혼하자.”며 동거 예찬까지 나오는 요즘 시대라, “첫영성체 때 하느님께 약속을 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서약한 바를 서로 지켜주며 살다간 동정부부 순교자는 진주처럼 더욱 빛을 낸다.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요한 루갈다 혼인 기념제 때 강론한 대로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나 부부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이 이곳 초남이 성지를 순례하고 요한과 루갈다의 참 사랑을 배워 복되게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 본다.

   성인이 되는 것을 보고야 말리라
   성지 지킴이 ●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

   토요일 오후 3시 초남이 성지 행랑채에서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하는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68세). 성지에 사는 신부들 모습이 대부분 그러하듯, 교구 총대리를 두 번 지내고 사제생활 40년이 넘은 그가 은퇴를 하며 자원한 성지 지킴이 노릇이 참 행복해 보인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성전을 지키던 예언자 시므온처럼 “동정부부가 성인이 되는 것을 꼭 보고야 말리라.”는 확신으로 “동정부부의 삶이 오늘의 혼탁한 세상에서 진주처럼 빛나 하느님 영광이 드러나도록 희망을 갖고 간구하자.”고 순례자들에게 권유한다.
얼마 전 발견한 ‘정지시암’ 터에다, 재산을 풀어 길손들을 대접하며 교리를 가르쳤던 유항검의 열성을 배우는 작은 교리당을 지어 예비신자들의 교육장으로 쓰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묵주알을 돌린다. 늘 도움이 따랐다며, 큰돈 들 일이 눈에 보이는데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실크로드(비단길)가 장사꾼의 길이라면, 생가 터에서부터 기적처럼 찾아낸 유항검 가족의 가매장 터와 교리당 터를 돌아오는 40여 분 거리는 ‘마르터로드(순교자의 길)’ 아니겠냐며 걸어가는 모습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다.
   어릴 적 신부 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싫어요. 장가 갈래요!” 하고 대답하던 그는, 가톨릭 대학 의학부에 지원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신학부를 찾아가는 바람에 대신학교 입학원서를 얻어왔고 그날 이후 운명이 바뀌었다.
   대신학생 시절 「피묻은 쌍백합」을 읽고 감동했던 그가 동정부부 생가 터에 와서 살게 된 사실도 섭리임에 분명하다. 수녀원 건물로 지은 집이라 작은 화장실이 세 개나 딸린 전국 최고의(?) 사제관에 산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루갈다의 잘린 목에서 솟았다는 하얀 피처럼 젖빛 안개가 자욱한 초남이 들녘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하는 길 위로 따스한 봄볕이 내린다. 스테파노 신부가 쓴 「속아서 된 신부」라는 자전적 에세이 초고를 뒤적이니 부럽기만 한 글귀 한 줄이 눈길을 끈다.
“나는 이곳에서 문을 여닫는 일꾼 노릇을 하면서 여생을 마치기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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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관 ☎ (063)214-5004, 011-674-1711

 

Emmanuelle II
경향잡지 1999년 12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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