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단 한번의 감사로?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10 조회수902 추천수8 반대(0) 신고

복음: 루가 17,11-19

며칠 전에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삼일동안 특수한 밀폐 시설이 갖추어진 독방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누구와 만나서도 쳐다보아서도 안되는 그야말로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야하는 핵 방사능 치료를 받았다.


음식과 약은 식판에 담아서 누군가 날라다 주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면 두꺼운 철판 뒤로 들어가 절대로 내다보아서는 안되고 그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나와서 그것들을 가져가라고 미리 철저히 교육을 받았다.


 

나의 몸에서 방사능이 방출되고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피폭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OK! 당연한 말씀이지.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간호사를 내보내고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는데...

그런데 막상 음식과 약을 들여보내면서 매번, 절대로 내다보지 말라고 소리소리 치면서 확인을 할 때마다 처음과 달리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서럽기까지 하였다.


알아서 피해입히지 않게 한다는데 왜 저 야단인지.. 무슨 전염병 환자라도 되어 있는 기분이 들고 사흘이니 그렇지 몇 달동안 이러고 있어야 한다면 정말 혼자 있다는 적막함보다도 그 사람들 때문에도 서러워 못살 것 같았다.

거기서 생각나는 것이 "나병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몇 달이 아니라 평생 사람들의 성화를 받으며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었다. 사람들 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내 곁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도 서러울텐데 오히려 환자가 먼저 사람들 기척이 나면 "나는 더러운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 " 하고 멀리서부터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접근을 막아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것도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말이다.(레위 13장)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치유받은 나병환자의 무리가 소개되고 있다.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크게 소리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지 모른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예수께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게 한마디하셨다.


나병환자가 더러는 자연 치유되는 일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악성 피부병 종류도 나병으로 오인하는 수도 있었고 옷에나 집에나 피어있는 곰팡이의 일종도 나병으로 생각했다. 어떻든 병이 나은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확인한 연후에도 아주 복잡한 절차와 예식을 거쳐서 비로소 정상적 생활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레위 14장)
그래서 예수님이 사제에게 어서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고만 성서는 기록되어 있다. 반신반의하며가던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기쁨에 들떴겠는가? 얼마나 빨리 격리 생활에서 해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친구들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겠는가? 그동안의 서러움과 외로움에서, 그 정 떨어지는 저주의 땅에서 한시도 머뭇거리고 있을 사이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사흘도 그러했는데 그들은 오죽했으랴?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사제에게 보이고 예식을 치르려면 예물 준비도 만만치 않고,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도 사실 많았을 것이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그들 대부분 예물 마련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동안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마음 속엔 가지가지의 근심과 걱정이 물밀듯이 일어났을 것이다. 가족은 모두 다 어디에 살고 있을 것인가? 살아있기나 한 것일까? 누가 반겨줄까? 예물은 마련할 수 있을까? 등등..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 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분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아홉과 이 한 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감사했다는 것과 그렇지 않았다는 외형적 사실만의 차이일까? 혹시 항상 무엇을 바라보고 살고 있었던 사람인가 하는 내면적인 시각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우리 주위엔 자신에게 벌어진 좋은 일을 은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똑같은 일도 우연으로, 재수 좋은 일로만 생각하고 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행운이 찾아와도 단지 행운일 뿐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사실은 나병에 걸렸던 것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 나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도 있었으므로...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다는 것이 아닌가?

이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향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병의 유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뒤에 계신 <분>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홉 명은 자신에게 지금 일어난 <일>과 앞으로 해야 할 또 다른 <일>에 온통 골똘하지만 사마리아 사람 한명은 <일>이 아닌, 일을 있게 하신 <분>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고 그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감사와 찬양은 그<분> 앞에서 자연스럽고 마땅하게 일어난 자발적 감정의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사람은 평소에 일어나는 사건(일)들 속에서 무엇을 보고 사는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신다.

열 명 모두는 <무게를 달 수 있는 몸-육신>이 깨끗해지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한 명은<무게를 달 수 없는 몸-영신>까지 살리는 선물을 덤으로 받는다. 한번의 감사로 재수좋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늘 그렇게 살고 있었기에 그 한번이 영신을 살릴 수 있는 기회까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냐 하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다. 좋은 일에서도 이러할진대 <궂은 일에서조차> 그분께 감사할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랴?

 

2000/11/15 에 써두었던 글입니다.

 

ps. 어떻게 나병환자가 평소에 감사할 일이 있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김보록(? 그렇게 기억하고 있지만..)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그분이 나환자 촌에서 강의를 하실 때,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을 하게 되었답니다...그런데 그 말을 나환자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 머쓱해져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앞의 나환자들이 끄덕끄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감동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음성 꽃동네에 걸린..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감사하라"는 것도... 결국 어떤 처지에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있다는 말씀이겠죠....신앙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끄덕여질 것입니다. ^^... 우리는...감사하기엔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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