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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11 조회수1,108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11월11일(목)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 투르의 성 마르티노 (316-397) 주교

  성 마르티노는 316년경 오늘날 헝가리의 판노니아 지방 사바리아에서 외교인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의 나이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뜻을 좇아 군에 입대한 마르티노는 친위대 기병이 되었고, 얼마 후 아버지의 전속(轉屬)으로 서유럽, 지금의 프랑스 북쪽 아미엥 지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어느 추운 겨울, 아미엥 성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에게 자신의 망토를 반으로 갈로 입혀준 그날 밤, 꿈속에서 그가 낮에 주었던 반쪽의 망토를 입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이 일로 해서 마르티노는 즉각 세례를 받았으니, 그 때의 나이는 18살이었다. 그 뒤 40살까지 줄곧 황제의 친위대로 근무한다.


  356년 자의(自意)에 의해 군생활을 청산하고 프와티에르의 힐라리오 주교를 찾아가 삶의 조언을 구하지만,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판노니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티노는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당시 성자의 신성(神性)을 부정하고, 양자설(養子說)을 주장하던 아리우스가 325년 니체아공의회를 통해 파문을 당하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헝가리의 일리리꿈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르티노는 이곳에서 아리아파와 논쟁을 벌이다 몰매를 맞고 쫓겨나,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지만 거기서도 아리아파 계열인 주교로부터 추방되어 숨어 지낸다. 360년 다시 힐라리오 주교를 찾아가 그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 361년 리귀제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 수도원이 당시 갈리아 전역의 첫 수도원이 되었다. 그 후 많은 은수자들이 몰려들어 큰 수도공동체를 이룬다.


  371년 마르티노는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루아르 강변에 위치한 투르(Tours)의 주교로 임명된다. 자신은 375년 마르무씨에르에 세운 수도원에 기거하면서 정열적이고 사목과 설교로 주교직을 수행한다. 마르티노 성인은 주변의 이교도인들을 선교하는 도중 397년 11월 8일에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11월 11일 투르에 안장되었다. 성 마르티노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순교(殉敎)하지 않고 성인반열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며, 서방 수도회의 사부인 베네딕토(480-550) 성인 이전에 서방 수도회의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이다.◆


[오늘의 복음]  루가 17,20-25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2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21)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22)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날을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저기 있다.’ 혹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찾아 나서지 마라. 24) 마치 번개가 번쩍하여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환하게 하는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그날에 그렇게 올 것이다. 25)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은 먼저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세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


[복음산책]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오늘 복음과 내일 복음은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준 기적사화(17,11-19)와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18,1-8)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언뜻 보기에 ‘종말에 관한 교훈’과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20-21절)와 인자(人子)의 재림(22-24절)과 수난예고(25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복음을 간단하게 종말교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종말에 관한 묵시적 가르침이 예수님 공생활의 말기에 재차 언급되기 때문이다.(루가 21,5-38)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있게 될 종말교훈은 사실상 공관복음 모두의 관심사이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물론 마태오의 종말교훈은 마르코의 그것보다 길고 내용도 풍부하다. 게다가 마태오는 종말에 관한 비유(마태 24,45-25,46)까지 곁들여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공생활을 요약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종말교훈에서 마르코의 종말교훈을 뺀 나머지 부분을 루가가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독자적으로 편집한 대목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것을 루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당도하시기 이전 시기에 있었던 가르침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이 자리에 배치될 수 있도록 루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끌어들여 예수께 질문을 던지도록 하였다. 그들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20a절) 이 질문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느냐는 ‘시기’에 관한 질문이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던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시기에 관한 질문은 구약에 예언된 ‘주님의 날’을 의미하고 있다.(이사 11,10; 13,13; 예레 31,31; 즈가 13,1; 말라 3,2) 구약성서의 이 대목들을 보면 ‘주님의 날’은 참으로 요란한 방법으로 도래한다. 그날은 만민의 야훼께서 당신의 진노를 터뜨리시는 날로서, 이스라엘과 새 계약을 맺는 날이고 샘이 터져 백성의 묵은 죄와 때를 씻어 줄 것이며, 이날 도래할 ‘주님’은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아서 그에게 맞설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는 만민이 쳐다볼 깃발이 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에게 찾아들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시는 ‘주님’이 로마의 지배를 끊고 세상의 통치권을 거머쥘 다윗과도 같은 왕으로서 ‘언제’ 오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님의 답은 우선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가 바리사이들의 생각같이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님’이 ‘이미’ 도래하여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강생은 단지 몇 명의 목동들(루가 2,16-20)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님은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 person)과 그분의 사역(使役, ministry)과 더불어 ‘이미’, 그리고 ‘여기’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이적활동이 바로 그 증거이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라고 대답하신 후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계속하신다. 이렇게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는 인자(人子)의 두 번째 오심으로 완성되고 성취될 것이지만, 당장에 그 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2절)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완성의 날을 조기(早期)에 선취(先取)하려는 어떠한 인간적인 유혹과 노력이나 활동도 거절하시며, 오히려 이를 경계토록 하신다.(23절) 제자들은 오로지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데 불림을 받은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미’, 그리고 ‘여기’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또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아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노력에 ‘고통’과 ‘배척’이 필히 수반된다는 것이다.(25절)◆[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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