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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8) 결론없는 결론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13 조회수953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04년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ㅡ요한3서5-8;루가18,1-8ㅡ

 

      결론없는 결론

                          이순의

 

 

짝궁이 세월을 어느만큼 살은 후에 참 어처구니 없는 푸념을 하던 날이 있었다.

"나는 장가를 들면 맨날 각시를 품고 잠자리만 허는 줄 알았네.

 그런데 잠자리는 커녕 이 가정을 유지할 책임 때문에 달린 것도 안서는 세월이었네.

 우리가 같이 한 지붕 아래서 머문 날을 계산한다면 5분지 1도 안될 것이고, 시간으로 계산을 한다면 100분지 1도 같이 머문시간이 없었네.

 뉴스를 보면 원조교제라느니, 성매매에 관한 법률이라느니 허는 말은 나 같은 놈 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네.

 세상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살게 되어있었네.

 그것을 허락허고 안허는 것은 하느님 마음이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네.

 그래도 나는 내 가정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살을라네."

 

이런 짝궁의 심성 때문에 떠돌이 장돌뱅이 팔자에도 각시인 나는 태평한 세상을 사는지도 모른다. 성서를 읽어 본적도 없는 짝궁의 말에 오늘의 복음이 내재되어있다. 인생이라는 과정이 그를 지혜롭게 하고 너그럽게 하고 현명하게 인도한 것이다. 경험이 스승이었지 배움이나 안다는 것이 그를 인도해 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세상이 요구하는 평균수준에 미치지 못 하여 불편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문맹이었을 때에 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전수 될 수 있었듯이 짝궁의 지혜는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삶은 개인의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지지만 역사는 군중이 이루는 보편적 성향이 뭉쳐서 한 시대의 틀을 이룬다. 가장 보편적 군중이 누렸다는 생활방법이 그 시대의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선택하는 기호는 다 다르겠지만 그 개인 개인이 선호하는 방향에 따라 시대는 대중적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그것은 국가의 역사도 물론이지만 종교의 역사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이라는 대중과 충돌하기도 하고 인정받기도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해 가듯이 종교 역시도 신도들의 염원에 부흥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군사정권이 무너진 이 시대의 대학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시는 분들이 있다. 진취적 미래에 대한 꿈이 사라진지 오래 된 대학은 밥벌이를 위한 투쟁의 산실로 전락 되었고, 최근들어서는 그나마의 역할조차도 상실된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일컬어 상아탑이라고 했거늘 그 정체성을 대학원에서 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 도래하고 말았다. 민주주의가 억압받는다고 생각되었을 때 개인은 자유를 기원했다. 그 자유가 각자에게는 얼마나 사사로움인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는 것, 읽고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마음대로 표현하는것, 심지어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대로 듣는 것, 등등!

 

얼마나 사사로운 것들로 인해 개인이 동요되고, 그 개인들이 뭉쳐 군중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가?! 그래도 그 시대에는 대학이라는 젊은 혈기가 외치고 받쳐서 민중을 리더하는 원천이었다. 그 결과로 피를 흘려야할 의미가 있었고, 가치와 보람도 존중 되었다. 막걸리 한 잔을 놓고도 국가의 앞날을 논할 수 있었던, 분명히 배부른 시대는 아니었다. 배 부르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력이 사회를 리더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당장 코 앞의 밥벌이도 근심이 되어버린 요즈음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영웅심쯤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배부른 사회가 빈곤한 정신을 리더하고 있다. 돈있는 부모세대가 무기력한 젊음을 안타까워하는 통한의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싼 양주를 놓고도 일자리 걱정을 해야 하고, 모피코트를 입고도 생활을 걱정해야 하며, 불법채류자들에게 일자리를 넘겨주면서도 실업인구가 넘처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그만큼 벅찬사회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종교라고 다르지 않다. 국가의 현실은 곧 종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외쳐야할 슬픔이 많았을 때는 종교가 짊어지고 위로해야할 몫이 넘쳐났다. 종교가 찾아가지 않아도 사회는 종교를 필요로 했고, 크나큰 노력이 아니라도 종교는 해야할 일을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서 살아왔다. 그만큼 종교는 암울한 시대의 영웅적 위상에서 배재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종교는 시대가 떠안아주는 근심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되었고, 거룩한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종교가 종교의 역할에서 조차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분명히 이나라의 모든종교는 발전했다. 그러나 민중이 자유를 수호하던 시대만큼 종교의 역할이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는가에는 의문이다.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종교안에서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사회를 능가하기에 이르고 있다. 종교의 활동영역이 사교적 나눔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기도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개인은 종교안에서 소외되었으며, 대형화 되어가는 공동체적 집단의식은 강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덩달아 종교를 이끌어가는 종사자들의 정체성은 방황의 넓이를 확산시키고, 종교안에서의 시각은 갈래를 가늠할 수 없이 흩어지고 있다. 소속감을 선택할 것인가? 탈퇴할 것인가? 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지금의 종교는 그 개인의 신앙과 영성에 몰입할 수 있는 어떠한 방편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신앙의 연륜이 깊은 신자들 조차도 종교안에서 개인의 신심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는 발전했으나 개인은 빈곤하다는 현상이 종교는 있으나 신앙은 외롭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교적인 관계안에서 원하는 취향을 쫓아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만족을 찾으며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의 정체이며 믿음인가? 현실의 인생고락을 짊어지고 해결해가는 진정한 위안과 평화의 안식인가?는 모를 일이다. 시대가 종교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때는 성직자들의 길도 영성의 울타리에서 머물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종교의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그다지 필요로하지 않는 시점에서 성직자들은 물질은 풍부하나 갈곳이 없다는 상실의 정신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영적 구제사업의 소용돌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안에서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짝궁의 말처럼!

" 세상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살게 되어있었네.

 그것을 허락허고 안허는 것은 하느님 마음이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네.

 그래도 나는 내 가정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살을라네."

종교안에서의 선택의 길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흐름을 찾아서 가야하는 것이다.

 

한 시대를 살면서 성의 관념보다 책임의 관념을 수행하기도 너무 벅차서 지쳐버린 짝궁은 달린 거시기도 힘을 잃을만큼 고단한 심정을 아내인 나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야 할 만큼 음성적 향락의 세계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간의 세계가 굶어죽는 인간이 몇 만이라는데 축적이라는 욕심의 끝을 몰라서 전쟁을 불사하여 진행중이다. 성직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시대의 정체성을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 가고자 신앙하는 고민과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고단한 성직자는 불면으로 새벽이 지쳐 힘을 소진 할 것이다. 그 반면에 사교적인 관계안에서 원하는 취향을 만나 만족을 맛 보시는 성직자는 오늘도 내일도 모여라 모여라 주님께서 이웃 가운데 계셨으니 나야말로 너희 가운데 있겠다 라고 살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살게 되어있다. 또한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찬반을 논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하시고 안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심을 잊지말아야한다.

진정으로 기도하는자만이! 성심을 다해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자기의 길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이 찬성해 준다고 해서! 부정해 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경험이 스스로의 스승이 되어 선택하는 지혜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잠자리도 못하고 살았을 만큼 고단한 짝궁도 무지한 자신의 성덕으로 주님 앞에 선다고 믿고있다. 내가 각시라고 해서 그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몫은 티끌만큼도 없다. 또한 남편이라고 해서 그가 나를 대변해 줄 수도 없다. 성직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ㅡ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루가18,8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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