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복음산책) 참으로 '보는 자'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14 조회수1,075 추천수15 반대(0) 신고
 

◎ 2004년11월15일(월)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성 대 알베르토 (1206-1280) 주교 학자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베르토 성인과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부러워할 것이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이토록 학문에 대성(大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알베르토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 진리에 접목시켜 스콜라신학의 기초를 놓았고, 자연 과학, 논리학, 수사학, 수학, 천문학,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 모든 학문영역에 ‘만물박사’(Doctor universalis)였으며, 이미 당대 사람들이 성인의 이름 앞에 ‘대’(大, Magnus)자를 붙여 칭송하였다.


  성인은 1206년경 독일남부 다뉴브(도나우) 강변에 위치한 라우잉엔에서 막강한 영주이자 기사계급의 혈통으로 태어났다. 알베르토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 많고 부지런했다. 이러한 성격이 그를 만물박사가 되게 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파도바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1223년 도미니코 수도회원이 되었고, 1243년 파리에서 문하생들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첫 학생이 되었다. 1245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쾰른으로 파견되어 수도회 대학을 세웠으며, 그 외에도 힐데스하임, 프라이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 등지에 학교를 세우고 문하생들을 가르쳤다. 1260년 주교에 서임되어 1262년까지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를 맡아 교구장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화목과 도시들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성인은 1274년 제2차 리용공의회의 교부로 일하였으며, 그 후 쾰른으로 돌아와 1278년까지 대학에서 가르치고 저술에 힘썼다. 성인은 1280년 쾰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1622년 시복되었으며, 1931년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오늘의 복음]  루가 18,35-43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38) 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39)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소경이 가까이 오자 41)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43)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복음산책]  참으로 ‘보는 자’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리고의 소경에게 광명을 주신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예수님의 일행이 그럭저럭 예리고(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에 당도했다. 예수님의 당도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길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한 사람도 그 소식을 듣게 된다. 마르코는 이 소경의 이름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마르 10,46)라고 밝히고 있다. 소경을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자렛 예수가 왔다는 말만 듣고 일단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는 사람들의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질렀다. 소경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귀에 도달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던 소경은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광명을 찾는다.(42절)


  오늘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화를 다른 많은 기적사화 중의 하나로 보기엔 너무 아깝다. 그 이유는 이 기적사화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소경의 치유기적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복음서 전체의 구조에서 같은 자리인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가 18,35-43)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기적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 기적으로서의 소경 치유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이 기적의 의미를 잘 알기 위해서는 앞서간 복음, 즉 예수께서 예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 그것은 바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추종의 의미와 섬김의 자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즉각 ‘추종과 섬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사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복음에는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늘 복음인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를 배치하였다. 루가가 ‘추종과 섬김’의 언급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예고의 끝 부분에 마태오와 마르코에 없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가 18,34) 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종합하여 보면, 제자들은 두 눈을 뜨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자(人子)의 본질적인 부분인 수난과 죽음, 추종과 섬김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권위, 자리와 보상만 보려했다. 이러한 제자들에 비하여 예리고의 소경은 장님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경이면서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을 실제로 보게 해 주신 것이다.


  끝으로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라 나섰다.”(43절)는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티매오가 광명을 찾고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단순히 감사의 표가 아니다. 그는 곧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그것은 바르티매오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을 목격하고 증언할 진정한 ‘보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보통 볼 수도 없을뿐더러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다. 참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 오늘 예리고의 소경처럼 말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