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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16 조회수1,352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11월17일(수)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 성녀 엘리사벳 (1207-1231)


  성녀 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의 국왕 안드레아 2세와 안덱스-메란의 게르트루드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1211년 성녀는 4살의 나이에 당시 교황 이노첸스 3세의 정략적 주선으로 독일 튀링엔 가문의 11살 헤르만과 정혼(定婚)을 하고 독일로 가서 미래의 시어머니 소피의 교육을 받으며 살게 된다. 그러나 1216년 헤르만이 갑자기 죽고, 이듬해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나자 막내 동생 루드비히 4세가 튀링엔의 영주가 된다. 결국 엘리사벳은 헝가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찍부터 그녀를 흠모해 온 루드비히가 사랑을 고백하자, 1221년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들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3자녀를 두었다. 엘리사벳은 1225년 이곳으로 진출한 프란치스코회원들의 무소유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27년에 남편 루디비히 4세가 아뿔리아로 출정하는 제4차 십자군에 가담하였다가 이탈리아의 오트란토에서 급서(急逝)하였다. 남편의 죽음소식을 접한 성녀는 “그와 함께 세상도 죽었다.”며 크게 슬퍼하였다. 그 후 그녀는 부군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성녀는 자녀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한 뒤 자선과 청빈을 서약하고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이 된다. 성녀는 마르부르크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기력이 쇠잔된 성녀는 병을 얻어 1231년 11월 17일 새벽 향연 24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독일 사람들은 성녀의 젊은 청빈과 자선의 정신을 공경하였고, 그 때문에 이미 1235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는 오늘날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강변에 자라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강물이 출렁이면 자신의 대를 굽히고, 강물이 차면 물에 잠기고, 강물이 빠지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힘으로 굽은 대를 세우며, 꿋꿋함을 회복합니다. 오직 겸손과 청빈만이 사람을 진정 기쁘게 하며 상한 것을 회복하여 바로 세워 줍니다.”◆


[오늘의 복음]  루가 19,11-28

<그렇다면 너는 왜 내 돈을 쓰는 사람에게 꾸어 주지 않았느냐?>


  11)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다. 12)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금화 한 개씩을 나누어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해 보아라.’ 하고 일렀다. 14) 그런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를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 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진정하게 하였다. 15)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마자 돈을 맡겼던 종들을 불러서 그 동안에 얼마씩이나 벌었는지를 따져보았다. 16) 첫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렸습니다.’ 하고 말하자 17) 주인은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하며 칭찬하였다. 18) 둘째 동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로 금화 다섯을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주인은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20) 그런데 그 다음에 온 종의 말은 이러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가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 두었습니다. 21)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22)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몹쓸 종아, 나는 바로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벌주겠다. 내가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는 지독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단 말이지? 23) 그렇다면 너는 왜 내 돈을 돈 쓰는 사람에게 꾸어 주지 않았느냐? 그랬으면 내가 돌아와서 이자까지 붙여서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며 호통을 친 다음 24)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저 자에게서 금화를 빼앗아 금화 열 개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하고 일렀다. 25) 사람들이 ‘주인님, 그 사람은 금화를 열 개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자 26) 주인은 ‘잘 들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내 원수들은 여기 끌어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하고 말하였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복음산책]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다.


  오늘 복음은 ‘금화를 맡은 종들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달란트를 맡은 세 종의 비유’(마태 25,14-30)와 흡사하다. 그러나 두 비유를 잘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마태오복음의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21장), 최후의 만찬을 목전에 두고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와 함께 발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임박한 종말의 시작과 인자의 재림을 다루는 주제에 전체적으로 편입된다. 마르코복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 걸맞은 몇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마르 13,34-36)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지막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해 놓았다.


  내용 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인다. 몇 가지 점만 지적하여 보자. 마태오는 단순히 어떤 주인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달란트를 맡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면(마태 20,1-16; 18,35 참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루가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준다. 여기서 금화 하나는 1미나로서 100데나리온의 금액이다. 루가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2절),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4절),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27절)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오늘 비유의 역사적 신빙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신빙성을 따진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런 모양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셨다면 이를 두고 왜 두 복음사가가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두 복음서가 많은 부분의 같은 내용을 두고 가감․수정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적인 복음서로 발전되어 온 것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이 비유를 발설하셨다면, 시기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 후가 될 것이며, 비유의 목적은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지긴 하지만, 이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 능력에 따라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비유를 가감․수정하여 마태오는 최후의 만찬 직전에 배치하고, 루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시기에 배치하였을까?


  문제는 하느님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물론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태어난 메시아가 왕으로 등극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군대를 쳐부수는 전쟁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세상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에 대한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 비유는 각각 마태오와 루가복음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발설한 비유를 두고, 마태오는 상당히 임박한 세상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루가는 거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비유를 말씀하셨다(11절)는 도입이 바로 그 이유이다.


  성서의 말씀이 기록된 후 2,0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것을 보면 루가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동시에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의 질책을 받는 세 번째의 종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다른 어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비참한 말로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이 주인의 의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였을 뿐 신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인은 각자가 맡은 것의 열매를 보고 싶어 한다. 하느님도 그렇다.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고, 사랑 없이는 생명도 없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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