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새하늘 새땅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27 조회수1,006 추천수4 반대(0) 신고
 새집으로 이사 온지 스무날이 되었다. 
수십년 끼고있던 고물들을 버리고 옷장도 냉장고도 소파도 새로 들여놓았더니 
새희망이 저절로 솟는 듯하다. 집을 새로 단장하며 마음이 부푸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일 것이다. 

 새집은 굽이굽이 산 능선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15층 아파트다. 
이불 속에서도 동트는 해를 감상할 수 있고, 앞 뒷산의 소나무 숲이 멋있다. 
그야말로 "새하늘 새땅"(21,1)이다. 

그 감동을 글로 만들어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올렸더니 의외로 썰렁한 반응이다. 
같은 아파트라도 전망이 모두 각각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산이 가까운 동은 산 때문에 답답하다고 했다. 
낚시터가 가까운 동에선 벌써부터 모기 걱정이다. 
동글동글 정다워보이는 뒷산의 무덤들도 너무 크게 보여 무섭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각자의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에 
전망 좋은 동과 층에 프레미엄을 얹어서 사려는 것이리라. 

전에는 낮에도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둡고 시끄러운 곳에서 살았었기에 
한낮까지 햇살이 들어오는 밝고 조용한 새집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약을 올린 셈이 되고 말았다. 
글 올린 것을 미안해하며 숨죽이고 있었는데 마침 어떤 분이 꼬리글을 달아주었다. 

자기 집은 비록 경치는 좋지 않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집이 부서져라 놀아도 
걱정 안 하는 일층이어서 다행이라 했다. 
또 한 사람은 가로막힌 산을 가꾸지도 않고 거저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무덤 옆 비탈길은 아이들의 안전한 눈썰매장이 되어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같은 여건에서도 사람들의 시각과 관점이 이렇게 천지 차이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로얄층을 마음 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새집에 와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둥이 남편 때문에 평생 마음 고생하던 자매의 말이 생각난다. 
"새집에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줄 알았어요. 
옛날 집에서의 암울했던 기억들을 모두 정리하고 새출발하자고 약속했는데..." 
다시 남편의 버릇이 도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것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날이 열리는 것은 
결국 외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사람의 속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새하늘 새땅''에 데려다 준다해도 
내가 새 사람이 되어야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21,9-10). 
그런데 사람의 속이 바뀐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몇 년 동안의 사업부진으로 예금통장도 바닥나고 설상가상으로 암까지 걸렸던 나에게 
새로운 날을 열어주신 분은 누가 뭐라 해도 하느님이시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21,3) 

그렇다.
나를 죽음에서 새로운 삶으로 건져주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 후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고 새세상을 볼 수 있었다. 
암흑 속에서 빛을 끌어 내주신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 
오십 나이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분에 대해 알아 가는 기쁨 속에 매일이 새로운 감동의 연속이다. 
분명 예전과 같은 하늘과 땅에 살고 있건만 
결코 전과 같지 않은 "새하늘 새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21,3) 

그렇다. 
내가 어디 다른 공간으로 이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공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새 세상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4) 

그렇다.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 투성이의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은 
내가 나의 의지로 지난 날의 과오와 죄악들을 청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이 나의 눈물을 씻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러니 매일이 감사와 찬미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내게 있어선 종말도 결코 다른 시간이 아니다. 
''몇 년만 더 살게 된다면...''하고 바랬던 그 날을 ''지금''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묵시록에서 말하는 둘째 죽음과 부활(20,5-6), 그 마지막 시간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를 살리신 주님은 우리 모두 누리고자 하는 천년 지복의 왕국을(20,1-6) 
현재의 시공간에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오로지 그분을 ''지금, 여기'' 마음 중심에 모시고 
언제나 그분의 새 신부로서 올바른 행위로 단장하고(19,7-8) 살아가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22,13)이신 그분 안에서 
매일 창세기와 묵시록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 내가 곧 가겠다''(22,7), 
''자, 내가 곧 가겠다''(22,12),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22,20) 
하며 거듭 저희에게 오시길 원하시는 주님! 

어서 오소서, 
어서 오셔서 저희를 언제나 새롭게 해 주소서! 
어서 오소서, 주 예수여!" 
 
-위 글은 생활성서(2004. 3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민병섭 신부님의 요한묵시록 해설 뒤에 붙여졌던 제 묵상글입니다....
올해 초 썼던 글이지만... 독서와 연관이 되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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