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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4) 사랑! 그 거룩한 쥐구멍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28 조회수1,29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4년11월28일 대림 제1주일 ㅡ 이사야2,1-5;로마서13,11-14ㄱ;마태오24,37-44ㅡ

 

          사랑! 그 거룩한 쥐구멍

                                      이순의

 

 

어두운 자색초에 빛이 도래하였다.

초 색은 엷어질 것이고 지상의 모든 어두움은 생명이 오실 희망에 들뜨게 될 것이다. 나도 이번 대림에는 오랜 침묵을 깨고 고해성사에 참여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무슨 고뇌가 그렇게 많아 성체를 모시지 않는지 내 자신에게 반문하는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아니 길었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성사를 보고 성체를 받아서 빛의 희망에 동참하라는 성령의 엄명으로 다가온다.

 

사랑! 그 사랑의 사무침에 아버지는 사람이 되기로 하셨다. 우리는 주간마다 천년의 달력을 넘기며 4천년의 기다림을 체험할 것이다. 성서의 역사는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오실때까지 신을 향한 인간들의 별의별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성서를 펼쳐서 제 팔자소관의 비애와 맞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인간의 심금을 위로하고 있다. 

 

전례력으로는 역사의 시작이지만 생활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이며, 잔치로는 전례력이나 생활력이나 겹쳐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활동도 어느때 보다 활발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는 많은 자리들이 요구되고 허락된다. 문제는 그놈의 사랑이 원수다. 또 문제는 나만이 사랑한다는 일편단심의 열성이 또 원수다. 더 문제는 너만 사랑허냐? 나도 사랑한다는 복수주의가 더 큰 사고를 친다. 아이고매! 어쩌사끄나?

 

알고도 모른체 해야되고 모르고도 모른체 해야되고! 알고도 알은체 해야되고 모르고도 알은체 해야되고! 알고도 음흉해야되고 모르고도 음흉해야되고! 알고도 거룩해야되고 모르고도 거룩해야되고! 알고도 받아줘야되고 모르고도 받아줘야되고! 알고도 거절해야되고 모르고도 거절해야되고! 어느장단에 춤을 출끄나? 염병할 놈의 사랑이 원수드라! 워매 살판났네!

 

그란디! 고놈의 사랑이라는 정체는 무엇인가?

세상에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부터 있었던 것이 있다. 창공도 없이 아버지 혼자 있을 때 부터 있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아버지 혼자서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심령을 자극해서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창조보다 먼저있었다. 그것은 곧 인류학적인 유전요인에 사랑이라는 혈관을 필수적으로 대물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근성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어있다.

 

그란디! 모두가 하는 그 사랑을 워째서 나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착각을헐까?

아버지께서 유일하셨으니까! 오직 한 분 뿐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심령을 동원해서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다. 당신께서 누구 눈치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기냥 사랑이를 눈치코치도 없이 막 퍼 부어버렸다. 유일신이 아니라 쌍둥이 신이었다면 쪼매 눈치를 보셨을지도 모를 상상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실때 눈치보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염치라는 것이 싹 빠져버렸다. 그 좋은 사랑이를 하는 것만 유전적으로 팍팍 심어준 것이다. 너희는 전부다 사랑만 허고 살아라! 그렇다보니 인간이 사랑에 빠지면 아버지처럼 눈치코치도 없어진다.

 

그란디! 워째서 인간은 남이 사랑하는 꼴을 못 보고 질투를 하는가?

아버지께서는 진짜로 사랑이를 넘치게 주셨다. 엿새동안이나 만들어서 다 주셨다. 서로 계산 없이 다 가지고 살으라고 허셨다. 그런데? 창조보다도 먼저 있었던 원초적 본능인 사랑이 원수다. 아버지처럼 되면 인류의 모든 사랑의 특권을 쥘수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사랑을 너무 받다 보니까 싸가지가 없어져뿌렀다. 자기가 인류의 사랑을 책임지는 줄 알고 범죄를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랑만큼은 쟁취의 대상이 된 것이다. 워째 너만 사랑허냐? 나도 같이 하자. 아니 너 비키고 나 혼자할란다.

 

그란디! 워째서 사랑을 하면 남들이 모른다고 착각을 하는가?

창조보다 먼저 있었던 아버지의 사랑보다 내 사랑이 더 깊으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속였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쯤이야 속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꾀에 아버지 손 바닥에서 노는 손오공이다. 손오공이 얼매나 재주가 많은가?! 하물며 인간이 원숭이 새끼 손오공보다 못 하면 사람이 아니지! 절대적인 열정의 내 가슴을 덮을자 누구이리까? 오~! 나 보다 거룩한 사랑은 없다. 으하하하하!

<위 내용은 신학이나 성서학이나 그 외의 어떠한 학문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는 무관한 독자적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세월을 두고 분석을 해본 나의 사랑학 논문이다. 뭐! 대상은 사제라고해서 제외되지 않으며 평신도라고 해서 더 가중되지도 않는다. 인간이면 누구나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전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창공도 없었던 아버지의 사무친 사랑을 헤아릴길은 없다. 엿새동안이나 만들어 주셨고 또 부족하여 인간 스스로 발전해 왔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가진 인간이 무엇이 허전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사무치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남아도는 것은 사랑뿐이다.  

 

교회가 대림시기를 보내고 화려한 성탄을 맞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성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성전과 충만한 기쁨들과 갖가지 명목의 잔치들! 다 좋다. 나쁘다고 결코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엄밀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구세주께서 구유에 오신 의미와는 매우 상반되는 모습이다. 바로 이스라엘이 4천년동안이나 기다렸던 실체불명의 성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실체를 더럽히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사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교우들께서는 모두가 사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사제의 곁에 서볼 수는 없다. 불과 몇십 명일 것이고, 능력 좋으신 신부님은 몇백 명도 된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먼저 붙인다.> 개중에서도 특이하게 꼽히는 사람이 있다. 자주 만나뵙는 신부님은 나만을 사랑하신다. 뭐 생각이야 자유니까 좋다.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하듯이 신자도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니까 다 좋다.

 

그런데 문제는 태초에 아버지께서 다 같이 사이좋게 살라고 주셨으면 신부님도 다 같이 나누어서 사랑하면 얼매나 좋은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것지만 사이좋기 싫은 사람들이 꼭 있다. 사이좋기 싫으면 혼자 끙끙 앓든지 상사병이 나든지 해야되는데 원죄의 보상을 실천하는 근성을 발휘한다. 친한 친구를 삼아서 일명 자칭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형성한다. 가슴속에 품은 거룩한 사랑이야기를 낭독해도 들어 줄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러고 나면 친구도 창조이전부터 있었던 원초적 사랑을 전염 받는다. 거기까지는 너무 잘 한 일이다.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다닌다. 그래야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랑 눈도장을 잘 찍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다보면 목적의 방향이 달라진다. 내 속 마음이나 들어주는 들러리를 세웠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더 열심히해서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맨날 그 친구만 바라보시는 것 같은 분노에 빠진다. 거룩한 사랑이 범죄를 선택하게 되는 진로변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음해! 모함! 모략! 시기! 질투.......! 그 배신의 향기는 독이 되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친구따라 강남 갔다가 미아가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 열심히 열심히! 우짜까? 잉! 결국은 등잔밑만 어두운 문제의 신자가 된다. 뭐! 신부님들의 상담은 받아보지 않아서 신부님도 원초적 사랑의 가해자가 되는지는 모른다. 가끔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몇몇 분들이 그걸 감당 못 해서 우수운 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교님께서 감담하실 몫이고!

 

거룩한 사랑에 빠지신 교우님들!

제발 그러지 말읍시다. 신부님이 아무리 외간 남자도 못 되는 공동체의 사람이라해도 그러지 말읍시다. 본당신자수 곱하기 두 눈을 계산해 보십시요. 대낮보다 더 밝은 쌍라이트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먹고 사시는 분들인지를 인식하십시요. 공부하지 않았고, 활동을 경험하지 못해서, 교회의 흐름을 모른다고 해서, 사제를 사랑하지 않는 신자라고 단정짓지 말으십시요. 신부님의 오른편에서 신부님과 웃었을 당신이 연옥이나 지옥에 있을 때 당신이 눈치코치도 외면하고 무시한 그렇게 많은 교우들은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사랑을 드리기만 했지 소유하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순결한 역사 대림시기에 각자가 가슴에 품고있는 사랑들을 꺼내놓고 펼쳐보자. 그 거룩한 나만의 사랑으로 내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있지는 않은지를 깊이 곰곰히 생각해 보자. 또 과거에 그런적은 없었는지도 생각해보자. 사람이 거룩할 수 있을 때는 내마음을 펼쳐놓고 내가 읽을 수 있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뒤에 자신을 돌아보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던 분들을 종종 만났었다. 그런분들은 진정한 자신의 성찰을 이룬 것이다. 연세가 많았던 어느 할머니는 젊었을적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참 많이도 어리석은 짓을 팔고 다녔음을 통회하시는 모습도 보았다.

 

결국은 거룩한 사랑으로 상처받는 것은 모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신앙을 돌아보며 성찰이 깊어졌을 때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용서라는 피해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었다. 물론 그 통회조차도 하지 않고 가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통회가 이루어졌을 때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음탕한 거룩함을 힘들어했었다. 물론 한 사람의 사제도 성찰의 몫은 자신의 것이다. 양심의 죄책감은 사제도 혼자서 감당해 갈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와 사제의 차이점이 있다면, 평신도보다 사제들이 용서하는 신의 모습을 넓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성찰이라는 결과에 대하여 사제와 평신도의 믿음이 다르다는 말이다.<이 말은 쪼꼼 이해가 어려울랑가?? 더 깊어지면 신의 영역에 오류를 남길 수 있으므로 이 만큼만!>

 

신앙이라는 거룩한 사랑에 사제나 수도자가 우상이 되지 않는 대림시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신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던 날에 아기예수는 인구조사에 참여하러 가신 것이다.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하여 실시하는 인구조사에 왕께서 오두막 하나없이 인간의 일에 참여하신 것이다. 어둠이 밝음으로 다가가는 대림초가 화려한 장식을 하고있다해도 주님께서는 결코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고 의지를 가다듬어야하는 것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전례력과 생활력이 모두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있다. 사랑! 그 거룩함이 쥐구멍으로 숨고싶지 않도록 모두가 사이좋은 성찰의 때를 잘 보내야한다. 오래오래 시간이 흐른뒤에 다시 돌아와 그 사랑을 보았을 때도 순결해야할 거룩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아야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밝혀둔다. 모든 교우들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파장이 상당한 숫자의 교우들에게 신앙을 어렵게 하며 사제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므로 대림절에 교우들이 성찰할 몫으로 적어본다. 이번 성탄에는 사이좋게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나눠 갖는 축복을 빌면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도 고른 사랑을 나눠주시기를 빌면서!

 

ㅡ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2,15-17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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