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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2 조회수1,313 추천수14 반대(0) 신고
 ◎ 2004년12월2일(목) -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7,21.24-27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복음산책]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는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함을 선언하였고, 이에 미국은 대대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후세인-멕마흔협정(1915년)과 중동의 터키영토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년)에 모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장군의 침략으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이 처참히 멸망한 뒤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비참한 운명을 감수하며 언젠가는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을 기약하고 ‘시오니즘’(Zionism,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을 꿈꾸어 왔었다.


  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인가. 1948년 UN은 영토도 없는 ‘이스라엘 건국’을 전 세계에 공포한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대 예루살렘 계획’은 일사불란하게 전쟁도 불사하며 진행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했던가? 2천년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원주민 아랍인들이 고립되고 추방되면서 점령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유대인들의 아랍인들에 대한 태도는 실로 냉정하다. 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주택, 정착금, 직업)아래 이스라엘을 향한 이민 길에 오른다. 2004년 현재 이스라엘에는 피부색이 다른 유대인계 에티오피아인들이 9만 명이상이 정착하고 있다. “이민의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무엇인가?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眞髓)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가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나 가르침을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頻度)가 잦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 즉 가르침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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