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굽비오의 늑대 (대림 제 2주일: 인권주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4 조회수1,003 추천수6 반대(0) 신고

                   굽비오의 늑대 (대림 제 2주일: 인권주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얼마 전에 저는 20여년 만에 친구들과 제주도에서 바다낚시를 하면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물고기들의 대화를 들었답니다.

 

*아기 물고기: 엄마, 나 저기 실에 달린 맛있는 새우, 먹을래요...
*엄마 물고기: 아가야, 안돼! 큰일난단다. 그런데 저 인간, 언제 풀렸났지?

 

  저는 그 물고기들의 대화를 듣고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제가 그동안 20여년간 수도생활을 한 것은 하느님의 성소도 있었겠지만, 저 물고기들의 민원(?)이 하늘나라에 접수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도 아니면서 낚시로 아버님과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던지 처음에는 고맙게 저희들의 물고기를 받아먹던 동네사람들도 나중에는 질렸다며 두손을 들 정도로 물고기를 잡았으니 말입니다. 아마 전국의 바다, 강, 못의 물고기들이 이런 간절한 기도를 바쳤을 것입니다.

 

  "주님, 저 포악한 물고기 킬러들을 하늘로 불러가시든지 아니면 어디든지 좀 데려가 주십시오. 그런데 저 젊은이는 착하게(?) 생겼는데 기왕이면 한 20여년간 산에서 도를 좀 닦으며 보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저는 하산하자마자 또 이렇게 바다낚시에 나선 것입니다. ^^*

  지금부터 1,000여년 전, 이탈리아의 아씨시 부근에 굽비오라는 마을에 무서운 식인 늑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그 식인늑대를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희생자만 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거지옷차림의 성자가 그 늑대를 찾아나섰는데 그 흉악한 늑대가 갑자기 온순한 양처럼 그 성자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성자는 누굴까요? 그분은 바로 오늘 제1독서(이사 11, 1-10)의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는 천국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었고 또 오늘 복음(마태 3, 1-12)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겸손한 세례자 요한을 꼭 닮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길을 닦은 것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회를 개혁한 위대한 분이지요. 이분에 관하여 지금은 천상에 계시는 민요셉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굽비오의 늑대에 대해 자주 떠올려봐.
그러면 늑대의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와.
고독에 떠는 울음소리가 깊은 밤 들려오는 듯 해.
어쩌면 늑대는 외로웠을 거야.
자신을 아무도 반기지 않고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서글펐을 거야.
사람들은 그러지.
자신을 반겨주지 않을 때 움츠러드는 대신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난폭해지고
또 강한 척 하는 속성이 있어.
늑대도 그랬을 거야.
세상에…단 한 사람,
 자신을 이해하려고 다가서는 그 한 사람.
얼마나 늑대가 눈물겹게 고마워했을까?
우리들도 그래.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고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그 한 사람을 가지고 싶어해.
그렇게 가졌을 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들은 모두 굽비오의 늑대와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살아가지.
그래서 끊임없이 그 한 사람을 기다리며
끝나지 않을 기다림을 끝내고 싶어해...

 

(민성기신부님의 금요강좌 2학기 첫 강의록 원고 내용 중)

 

  오늘은 대림 제 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 더 나아가 인간이 잘 다스려야할 피조물까지도 괴롭히며 짓밟고 살아왔습니다. 위에서 제가 예를 든 물고기며 늑대들이 그동안 얼마나 '제대로 된 인간들'을 갈망하며 기다려왔겠습니까? 아마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사목서간에 이런 표현을 하셨나 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 22)

 

  최근에 대전 평화방송의 방윤석신부님이 발간한 '말씀의 전화 개설 10주년 기념 강론집'에 의하면 로마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한번은 어느 귀족집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은 황제가, 실수로 식탁의 유리컵을 깨었다고 자신의 하인을 죽이려는 주인을 보고 놀라,


  "여보게, 그 하인이 불쌍하니 제발 살려두게나..." 하였지만, 그 주인은
  "황제시여, 그 말씀이 지당하오나 저희 관습헌법(?)에 의하면 '주인에게 자기 노예를 마음대로 죽일 권한이 있다'함이오니, 저는 저의 권리를 행사하겠나이다..."


  그날밤 황제는 화가 나서 돌아와, 자기 부하들을 보내어 그 귀족집의 유리컵을 모두 박살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그 주인에게 "이것은 황제의 권리이네..."라고 전하라고 했다는군요. 아무튼 유리컵 하나와 한 사람의 목숨을 맞바꾸던 것을 소위 관습헌법이라고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그후 그리 오래가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자비한 생명경시풍조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도 계속 재현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수십 명 , 수백 명이 죽는 모습에는 우리가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기 부모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 즉 수백만명의 낙태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게 때문입니다.

 

  개가 사납게 짖는 것은 그 개가 사나와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짖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점점 갈수록 무섭고 사나와지는 자연 환경과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됩니다.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처럼, 1,000년 전에 성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신 것처럼, 대자연과 인간들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기다리고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들과 이웃, 그리고 날아가는 새, 길가에 있는 풀 한 포기에도 우리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인권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브리엘통신

 

추신: 굽비오의 늑대에 관한 노래를 듣고 싶은 분은 민신부님의 추모홈피(http://min0319.com) '풍경의 창'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