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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5일 야곱의 우물-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5 조회수942 추천수3 반대(0) 신고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마태 3,1-­12]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그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리고‘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 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유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필름처럼 남아 있는 영상은 끝없는 광야와 사막이다.바람소리 외에 도시의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는 황야, 한국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 풀도 나무도 없고 황갈색의 흙과 바위만 끝없이 펼쳐진 곳.광야 에 대한 첫인상이 확실하게 찍히는 순간이었다.
아, 바로 이런 곳을 광야라고 하는구나.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 든지 펼쳐져 있는 것이 광야다, 이곳에서는. 그러니 세례자 요한도 예수 님도 광야에서 지내셨다는 것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복음의 묵상 주제는 바로 이 광야에 등장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어보는 것이리라.
그날 우리는 네겝 사막을 지나 예수님이 단식하신 곳이라는 광야에 내려 서 30분간 묵상 시간을 가졌는데 좀더 오래 머물면서 피정할 수 있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밤도 지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불편하고 황량한, 말 그대로 도시인은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이런 곳에 익숙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노예살이일망정 이집트에서는 따뜻한 잠자리와 고기냄비가 있었다 는 추억이 끝까지 이 백성을 유혹했다. 그래도 다른 도시민보다는 어느 정도 수월하게 길들여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 없는 불평 불만과 반항을 보면 광야에 쉽게 길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 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마다 거쳐가는 광야는 어떤 공간적 개념보다 시간적·사건적으로 겪 는 고빗길이기에 누구는 30대에,또 누구는 40­50대에 처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이요, 천길 낭떠러지에서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하는 시련의 때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반항하고 번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만큼 끝까지 모 든 것을 시도해 본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렇게 밖에 안 되느냐고, 다른 길은 없느냐’고 온갖 의문과 회유와 도전적 질문을 한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을 향한 여 정을 시작하게 했을 때 백성들은 끊임없이 모세에게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 그것은 몇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 로 길들이기 위해서다. 광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장소다.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다.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거치게 하시 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육하시고, 또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광야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으로 길들여지는 데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다가오시는 예수」 중에서, 유광수 신부 저)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리라 바로 그러한 광야에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나타난 하느님의 위대한 전령,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너무나 분명하고 권위가 있었기에 유다 전지역에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율법에 충실하고 올바르게 살았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요한은“너희는 회개했다 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며 구체적이고 실천적 생활의 변화를 요구 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 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 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례자 요한의 간곡한 외침을 듣는 것이 오늘의 과제 라면 혹독한 심판의 말씀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깨끗이 가려내실 알곡을 내가 먼저 추려내는 일 그리고 불에 태워 버릴 쭉정이를 내가 먼저 가려내는 일. 요한은 긴박하게 심판과 정의의 때를 알리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과연 나의 알곡은 무엇이며 쭉정이는 어떤 것들일까?
요한이 자신의 뒤에 오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 였다.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광야의 고독과 고통과 괴로움, 온갖 불편, 그것들이 바로 불 같은 시련이 아닐까?
그 시련의 불속에서 이미 쭉정이는 다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았을까?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속에서 불씨처럼 남아 있는 주님께 대한 실낱 같은 희망, “내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 주님밖에는”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뢰가 남아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반기시고 알곡으로 곳간에 고이 쌓아주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광야는 바로 주님의 성령의 불이 있는 곳이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잠자리와 안주할 수 있는 온갖 편리함을 멀리하고서 황폐하고 외롭고 목마름 속에 살아야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그 뜻은 바로 그곳이 성령의 불꽃이 살아 있는 곳이기에 바로 뒤에 서 계신, 우리를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끄실 그분을 바로 만나라는 뜻이 아닐까?
당신의 빈 들에 서게 하소서/때가 되었습니다/당신의 불, 타는 빈 들에 서게 하소서/몸에 지닌 모든 것을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빈 들의 타오 르는 불이여, 불꽃이여/당신의 불, 타는 빈 들에 서게 하소서.(이현주) 『야곱의 우물』 《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12월 5일자 박문희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님의 글입니다 . *^^* 안나가 (올립니다.)요*^^* 《소스 입니다》 <embed src="http://lluvia666.com.ne.kr/swish/solitude.swf"style=" "width="640" height="396"></embed> <pre><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2pt"> <b>♣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b> <FONT color=gree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b>[마태 3,1-­12]</b><FONT color=red style="FONT-SIZE: 10pt">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br>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br> 그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br>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br> 그리고‘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br>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 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br>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FONT color=#0000cd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b>유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필름처럼 남아 있는 영상은 끝없는 광야와 사막이다.바람소리 외에 도시의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는 황야, 한국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 풀도 나무도 없고 황갈색의 흙과 바위만 끝없이 펼쳐진 곳.광야 에 대한 첫인상이 확실하게 찍히는 순간이었다. <br> 아, 바로 이런 곳을 광야라고 하는구나.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 든지 펼쳐져 있는 것이 광야다, 이곳에서는. 그러니 세례자 요한도 예수 님도 광야에서 지내셨다는 것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복음의 묵상 주제는 바로 이 광야에 등장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어보는 것이리라. <br> 그날 우리는 네겝 사막을 지나 예수님이 단식하신 곳이라는 광야에 내려 서 30분간 묵상 시간을 가졌는데 좀더 오래 머물면서 피정할 수 있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br> 지금 생각하면 하룻밤도 지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불편하고 황량한, 말 그대로 도시인은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br>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이런 곳에 익숙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노예살이일망정 이집트에서는 따뜻한 잠자리와 고기냄비가 있었다 는 추억이 끝까지 이 백성을 유혹했다. 그래도 다른 도시민보다는 어느 정도 수월하게 길들여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 없는 불평 불만과 반항을 보면 광야에 쉽게 길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 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br> 사람마다 거쳐가는 광야는 어떤 공간적 개념보다 시간적·사건적으로 겪 는 고빗길이기에 누구는 30대에,또 누구는 40­50대에 처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이요, 천길 낭떠러지에서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하는 시련의 때일 것이다. <br>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반항하고 번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만큼 끝까지 모 든 것을 시도해 본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렇게 밖에 안 되느냐고, 다른 길은 없느냐’고 온갖 의문과 회유와 도전적 질문을 한다. <br>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을 향한 여 정을 시작하게 했을 때 백성들은 끊임없이 모세에게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 그것은 몇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 로 길들이기 위해서다. 광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장소다. <br>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다.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거치게 하시 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육하시고, 또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광야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으로 길들여지는 데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다가오시는 예수」 중에서, 유광수 신부 저) <FONT color=#0000cd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b>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리라</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바로 그러한 광야에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나타난 하느님의 위대한 전령,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너무나 분명하고 권위가 있었기에 유다 전지역에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율법에 충실하고 올바르게 살았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요한은“너희는 회개했다 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며 구체적이고 실천적 생활의 변화를 요구 하였다. <br>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 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 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br>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례자 요한의 간곡한 외침을 듣는 것이 오늘의 과제 라면 혹독한 심판의 말씀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깨끗이 가려내실 알곡을 내가 먼저 추려내는 일 그리고 불에 태워 버릴 쭉정이를 내가 먼저 가려내는 일. 요한은 긴박하게 심판과 정의의 때를 알리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과연 나의 알곡은 무엇이며 쭉정이는 어떤 것들일까? <br> 요한이 자신의 뒤에 오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 였다.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광야의 고독과 고통과 괴로움, 온갖 불편, 그것들이 바로 불 같은 시련이 아닐까? <br> 그 시련의 불속에서 이미 쭉정이는 다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았을까?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속에서 불씨처럼 남아 있는 주님께 대한 실낱 같은 희망, “내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 주님밖에는”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뢰가 남아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반기시고 알곡으로 곳간에 고이 쌓아주시지 않을까? <br> 그렇다면 광야는 바로 주님의 성령의 불이 있는 곳이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잠자리와 안주할 수 있는 온갖 편리함을 멀리하고서 황폐하고 외롭고 목마름 속에 살아야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그 뜻은 바로 그곳이 성령의 불꽃이 살아 있는 곳이기에 바로 뒤에 서 계신, 우리를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끄실 그분을 바로 만나라는 뜻이 아닐까? <br> 당신의 빈 들에 서게 하소서/때가 되었습니다/당신의 불, 타는 빈 들에 서게 하소서/몸에 지닌 모든 것을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빈 들의 타오 르는 불이여, 불꽃이여/당신의 불, 타는 빈 들에 서게 하소서.(이현주) <FONT color=purple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b>『야곱의 우물』 《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12월 5일자 박문희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님의 글입니다 . *^^* </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IMG src="http://youngminene.com.ne.kr/New_Menu/image/brigid_logo.gif"> <b>안나가 (올립니다.)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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