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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겨운 판공성사표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5 조회수1,538 추천수7 반대(0) 신고

대림시기가 또 다시 돌아왔는지 지겨운 판공 성사표가 다시 나왔다.


무슨 죄가 있다고?
교회를 위해 활동을 하고 신자들을 위해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이렇게 동분서주하면서도 식구들을 거두고....
나처럼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지.
도대체 시간이 있어야 죄를 짓지.
내가 짓는 소죄 정도야 사람이면 누구나 짓는 죄가 아닌가?
그래도 성사를 안보면 기록에 올라갈테니 보긴 봐야 할텐데 대체 무슨 죄를 짜내나?
있는 투정 없는 투정 입이 다섯발은 나와서 설거지를 하며 죄를 짜내고 있었다.

라디오를 켰다.
어느 방송인지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나긋하고 매혹적인 저음의 목소리에 빨려들 듯 귀를 기울였다.

"시래기 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놓고 늘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고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 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고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배가 아프다고 나가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상이 물러나올 때까지 부엌에서 애꿎은 아궁이만 휘젓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쩌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실 때면 다 찌그러진 판잣집이 누추하다며 황송해하시고는
얼른 구멍가게로 달려가 맥주 한 병을 들고 오셔서 따끈~하게 데워주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지요.
'내가 죄가 많아서....내가 죄가 많아서...'

자식이 굶어도, 자식이 병들어도, 자식이 월사금을 못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전쟁의 탓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고 식구들이 너무 많은 탓이고 피난살이 하던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설움이건만
유독히 어머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죄 탓이라고 하셨지요.

이제 어머니의 나이가 된 지금 돌아보면은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큽니다."

조용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시를 읊듯이 또박 또박 말씀하시던 어느 신부님의 나직한 말씀이 죄를 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후려쳤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르고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래, 하느님 사랑을 잃어버렸구나! 어서 판공 하러 가야지.'
그러나 다른 볼일을 보느라고 그 생각은 잊혀지고 말았죠.
게다가 미적거리느라고 우리 본당의 판공 날자는 모두 지나가고 상설 고백소로 가야할 판이었거든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녁이 되어 다시 부엌으로 식사 준비를 하러 들어가면서 라디오를 켰습니다.

"시래기 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바로 그 대목의 말씀이 다시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평화방송에서 하는 '일일 묵상'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큽니다."

오! 하느님!
제가 무엇이기에 공중 전파까지 이용하여 저를 깨우쳐주시려 애쓰십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죄가 없다고 완강히 버티고 있는 저를 불러서 굳이 씻어주시려는 당신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온몸에 느껴지고 생각지도 않았던 미세한 죄의 목록들이 머리 속 가득히 떠올랐습니다.
엉터리 없는 봉사로 자만했던 죄.
교회를 위해 한다고 사람들을 위해 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서 능력을 뽐내려 했던 죄.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을 은근히 시기하고 기회가 되면 깎아 내리려 했던 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고 멀리 했던 죄.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아프게 했던 죄.
그 잘난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며 식구들에게 소홀히 했던 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감사하며 살지 못한 죄.
그러면서도 결백하다고 교회 법을 비판하며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려했던 죄등등등....

실컷 울고 나니 흐르는 눈물에 벌써 그 많은 죄는 씻겨진 듯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신부님께 찾아가 고해하고 나왔을 때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서 들려오고.....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 날라가는 기분이었고 콧노래마저 흘러나왔습니다.

아! 주님이 내게 주시려던 것이 이것이로구나.

고해 성사의 은혜가 바로 <평안>이며 <기쁨>이며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임을 찐하게 체험했었죠.
나는 판공 성사 때마다, 몇 년 전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누구신지도 모르는 신부님-아니 주님의-목소리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목소리였죠.
그리고 나처럼 죄를 짜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혹시 오늘도 죄를 짜내고 있는 분은 안계신가요?

 

2000. 12,2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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