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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이 보이는 창 (대림 제 2주간 토요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10 조회수956 추천수8 반대(0) 신고

                                삶이 보이는 창 (대림 제 2주간 토요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어제 오후에는 주안 5동 성당의 사제다락방에 이어 저녁에는 노동자방(?)인 동암역부근의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노동자 쉼터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예수회의 김정대(프란치스코) 신부님이 운영하는 노동자들의 쉼터였습니다. 그곳은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간이며 간단한 식사와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레스토랑분위기였습니다. 그곳에 잠시 머무르면서 이런 쉼터가 모든 성당, 모든 마을마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늦게 인근본당에서 판공성사를 도와드리고 돌아오는 김신부님을 만났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듯이 이런 좋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잘 대해드리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잘 대합니다...이곳 삶이 보이는 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만나고 사람들도 만났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7, 10- 13)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밖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려면, 우선 창문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눈이 필요하겠지요. 저와 같이 눈이 나쁘면 안경이나, 콘택트 렌즈, 라식수술등을 통해 시력을 교정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자나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안은 물론 심안, 영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수천 년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심안, 영안이 깜깜하게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대학원 때에 중도에 실명하였지만 마음과 신앙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보이는 창문이 되어주시는 김 안드레아님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라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또 다른 아름다움>

 

  난 자주 집 가까이에 있는 뒷산에 오른다. 오늘도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산에 올랐다. 한동안 바쁜 일로 와 보지 못해서 그런지 어느덧 산은 완전히 숲으로 뒤덮인 여름 산으로 바뀌어 버렸다. 코끝에 느껴지는 푸른 내음과 새소리가 너무도 좋다. 초여름의 산야에 울리는 뻐꾸기, 꾀꼬리, 산꿩 장끼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기만 하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졸졸 흐르던 계곡이 제법 큰 물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어디선가 초록의 내음과 함께 연한 풀꽃 향기가 느껴진다. 아내는 내 손을 오솔길 가에 피어 있는 꽃에 대어 준다. 꽃이 조금 크고 동그라며 예쁘다. 코를 대 보니 은은한 향기가 있다. 엉겅퀴란다. 꽃에서 손을 내려 잎을 만지니 무척 따갑다. 잎 끝에 가시가 달려 있다. 잎은 가시로 되어 있는데 꽃은 아주 우아하고 예쁘다. 조금 더 오르다가 진한 향이 있는 곳에 자생 인동초가 있다. 넝쿨이 나무를 타고 기어오르며 하얀 꽃을 달고 있다. 아담한 꽃에 아주 진한 향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하얀 작은 종이 달린 모양의 은방울꽃, 상추 같은 잎에 자그마한 자주 꽃을 달고 있는 앵초, 난초 같은 잎에 보라색 꽃을 피운 붓꽃 등 많은 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꽃을 좋아했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까지 넓은 마당이 있는 고향집에 살며 많은 꽃을 가까이해서 그런가 보다. 소박한 정원에 작은 채송화, 분꽃, 봉숭아, 창포, 꽈리, 매화, 장미, 해당화 등 많은 꽃들이 가득했다. 키 작은 채송화에 벌들이 가득 붙어 있는 고향 정원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짙은 노랑과 갈색이 섞여 있는 벌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꽃을 생각하면 항상 어렸을 적 고향 마당의 평화로운 정원을 떠올리게 된다.

 

  대학원 4학기 시절 연구소 연구와 학위 논문에 정신없던 그때에도 나의 책상 위에는 여러 색깔로 앙증맞게 붙어 있는 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었다. 책상에 놓인 예쁜 화분을 들여다보며 좋아했었다. 그런 내가 학위 논문을 쓰던 중 갑작스런 눈 질환으로 인해 투병할 때였다. 낮에는 혼자 걸을 수 있는 시력으로 투병하던 어느 날, 난 병원에 다녀오면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종로 5가를 지나고 있었다. 길가에는 꽃집들이 즐비하였다. 꽃집 앞에는 많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난 자신도 모르게 한 화분 가까이 갔다. 분홍빛의 큰 꽃잎이 흐린 시야에 들어왔다. 영산홍 꽃이었다. 난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꽃잎 가까이 들이대었다. 마치 꽃잎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들여다보며 난 그 아름다운 분홍빛 꽃에 빠져 있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얼마 후면 이 아름다운 꽃잎과 색깔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은 너무도 절실하고 처절하였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아저씨,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하는 소리에 난 뭐라도 들킨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며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완전 실명 후에 난 많은 어려움과 충격을 받았는데 꽃에 관한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명 후 첫해 봄에 봉사자와 함께 능동 어린이 대공원을 갔을 때였다. 대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입구에 있는 진달래 꽃 앞으로 나를 봉사자가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꽃잎에 대주었다. 난 꽃잎을 만지는 순간 그만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보랏빛의 예쁜 진달래꽃이 아닌 차가운 물체가 만져졌다. 다시 한 번 만져 보았다. 역시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차가운 무언가가 전해졌다. 눈으로 보았고 그렇게 상상했던 꽃은 그저 차가움의 물체였던 것이다. 난 크나큰 실망과 충격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보았던 아름다움과 손끝에 느껴지는 현실은 전혀 달랐다.

 

  요즈음 우리 집 정원엔 온갖 꽃들이 피어 있다. 이 계절에는 특히 창포 꽃이 만발하여 보랏빛이 가득하다. 초록의 잎에 쭉 올라온 보라 꽃대가 수없이 피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난 곱게 피어 있는 창포 꽃을 만지며 부드러운 꽃잎과 그 자태를 느껴 본다. 그리고 그 풋풋한 향을 깊이 마셔 보곤 한다. 이렇게 하면 그 아름다움을 거의 그대로 즐길 수 있다. 꽃잎도 하나하나 만져 보고 모양도 느끼며 꽃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역시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것만이 아닌 조금 다른 방법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과 봉사자들 앞에서 강의할 적마다 난 이렇게 묻곤 한다.

“시각 장애인과 함께 가다 꽃을 보면 어떻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꽃을 설명하고 손을 꽃잎에 대어 주십시오. 그리고 향을 맡게 하면 그 아름다움을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부드러운 꽃잎의 촉감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꼭 보아서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주: 김광석(안드레아)님은 가톨릭아마추어무선사회(마르코니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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