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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인에게 항복하소서!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11 조회수1,172 추천수14 반대(0) 신고
                    죄인에게 항복하소서!


  십자가를 안테나로!

  어제 저녁엔 소사성당의 성탄 판공성사를 도와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2층 유아방에서 고백성사를 드렸는데 성당쪽으로 향한 대형유리에는 하얀 전지로 차단이 되어있었고, 또 고해자와의 칸막이에도 흰 종이로 가려져 있어, 저는 이 흰색이 하느님의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참고로 고백성사에 관한 저의 글들과 이 세상이 거대한 고백소라는 민신부님의 글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하느님의 항복>


   로마유학시절에 성당을 순례하다가 가끔 본 아름다운 광경은 성당안 고해소에서 고백성사를 보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입니다. 저는 그 진지한 고백성사광경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전에 어느 할머니가 고백소 안에서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잘못 보고 '신부는 죄인에게 항복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 '씨익󰡑 하고 웃어 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가을을 보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가을 단풍을 못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말에 교외에 나가면 볼 수 있겠지만 시내에서 서울 덕수궁 돌담길과 같이 낙엽을 밟으면서 거닐만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국의 가을 단풍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은행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수녀님이 좋은 피정이 있다고 하여 속아(?) 참석한  예비 신학생 피정에서 지도신부님께서 '은행나무와 같은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신부님은 은행나무는 나뭇잎, 열매, 나무,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며 은행나무의 경제성을 강조하셨는데, 저는 󰡑노란 손수건󰡑이란 단편 소설을 읽고 그동안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경고장(Yellow Card)과도 같이 생각되었던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기에, 더욱 더 한국의 노란 은행잎이 그리워집니다.


   또 로마에 와서 겨울에 더욱더 아쉬웠던 것은 하얀 눈을 못 본 것입니다. 로마의 겨울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 오히려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옵니다. 저는 이 하얀 눈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항복󰡑(백기?)이라는 걸 수년 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요즘은 '테러󰡑라는 단어가 인터넷 검색어의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영화를 볼 때만 해도 테러는 극히 일부 특정지역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영국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일원인 어느 청년이 폭탄테러의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청년은 교도소에서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불우한 성장과정을 비관하며 가족들의 면회마저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에게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도 테러 공범이라고 허위자백을 하여 아들과 같은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아버지를 미워하고 다른 죄수들과 합세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합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사랑과 인내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찬 그들을 사랑으로 따뜻이 녹입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 아들도 서서히 그 희생적인 아버지의 사랑에 녹아들어 갑니다. 이제 그 교도소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심지어는 간수들도 그 아버지를 존경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날밤 교도소의 모든 죄수들은 그 죽음을 슬퍼하며 창밖으로 하얀 종이조각을 일제히 날립니다. 하얀 종이조각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즉,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우리 모든 죄인에게 항복하는 하느님의 하얀 눈처럼 차가운 땅에 소리없이 쌓입니다."


   아마 성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수개월동안이나 성탄의 의미을 깨닫게 하고 있는 성탄 구유의 아기 예수님도, 분열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성프란치스코도, 또 얼마 전에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씨시에서 모여 기도했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도,  하느님의 그 항복?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그 항복을 본받으면(내탓이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요?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먼저, 집에선 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먼저, 학교에선 선생님이 먼저 그 항복을 실천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항복이 우리에겐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이 겨울에 하얀 눈이 아닌 하얀 가루(탄저균), 하얀 재(핵폭탄 낙진)가 흩날리지 않도록, 하느님의 항복을 본받읍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으로' 화해를 청하고 항복하는 사람이 됩시다.   (로마에서 가브리엘통신)


                          <고백성사와 고발성사>


   며칠 전에 서울의 모 본당의 자매님에게서 판공성사를 보았다는 이야기와 수천명의 신자들이 단 며칠 만에 고백성사를 보아야 했기에 고백성사가 좀 급하고 형식적이지 않았나?하는 불만섞인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전의 본당 신부님은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기 몇달 전부터 판공성사를 앞당겨 주셨기 때문에 그때는 좀더 여유있게  고백성사를 본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저는  미국과 한국 등을 돌며 전세계의 죄인들을 고백소에서 다 만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신자분들이 자신의 본당 신부님보다는 손님 신부을 선호했기 때문에, 후원회 미사 전후엔 아예 고백소에서 진을 치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특히 판공성사기간에는 "수난기약 다다르니" 성가를 부르면서 고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제게는 은총의 시간이 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로는 "신부는 죄인에게 항복하소서!"라고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판공성사의 의무감에서 들어 온 분이 있었는가 하면, 수십년 냉담 끝에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고백소에 들어온 분들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통풍도 잘 안되는 고백소에서 수시간 앉아 있다 보면, 고백소의 순교자이셨던 비안네 신부님, 비오신부님 생각도 나고, 마치 그 고백소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세탁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즉 남의 빨래를 하다보면 내발도 씻어진다는 말처럼, 고백소에 들어 오는 분도 세탁이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제 자신도 세탁이 된다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제에게 가장 힘든 분은 고백성사가 아니라 고발성사를 하는 분입니다. 즉 자신의 죄는 고백하지 않고 열심히 남의 죄를 고발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고발 중에 몇번 주의를 주었지만 그분들이 못 알아 들으면, 저는 "실례지만 지금 누구의 빨래를 하고 계십니까?" 라고 하면, 그분들이 그제서야 잘 알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백성사를 "영혼의 세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통회(불리고), 고백(돌리고 치고), 보속(말리는)을 통하여 하느님의 깨끗하고 거룩하고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우리가 여러가지 결점이 많은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성사를 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싸구려 옷는 집에서 간단히 손세탁을 할 수 있겠지만 고급 옷은 세탁소에 맡겨 전문 세탁을 하지 않습니까?  이번 대림절에는 집에서 간단하게 손세탁하지 마시고, 전문 세탁가(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이 운영하는 영혼의 세탁소인 성당에 가셔서 깨끗하고 거룩한 여러분의 세례때의 모습을 되찾으시길 빕니다. 그리고 한 사제가 교황님께 고백성사를 드림으로 인해 깨끗이 세탁이 된 실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뉴욕 대교구의 어느 사제가 로마의 한 성당에 기도하러 들어가다가 성당 입구에서 한 거지를 만났답니다. 그를 얼핏 바라보던 그 사제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의 동료임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가 지금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에 놀라며 그 사제는 거지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거지에게서 그가 믿음과 소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게 되었답니다. 따라서 그 사제는 몹시 충격을 받았었답니다.


  다음날 그 사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개인 미사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었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미사 말미에 교황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답니다. 자기 차례가 되어 교황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 사제는 자신의 옛 신학교 동료를 위해 기도를 청하고 싶은 내심의 충동을 느꼈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교황님께 그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었답니다.


  하루가 지나 그 사제는 바티칸으로부터 교황님과의 저녁식사에 그 거지를 데리고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었답니다. 그 사제는 그 성당으로 다시 가서 옛 친구에게 교황님의 초대를 전했었답니다. 그리고 그를 설득하여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 교황님 앞으로 데려갔었답니다. 그날 저녁 식사 후에 교황님은 거지와 둘만 있게 해달라고 사제에게 부탁했었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 거지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부탁하셨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놀라며 자신은 지금 사제가 아니라고 말했었답니다.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었답니다.


 "한번 사제이면 영원한 사제입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저는 이제 더이상 사제의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고집했었으나,  "나는 로마의 주교입니다. 이제 내가 그 사제의 권한을 수여합니다" 라고 교황님은 말씀하셨었답니다. 그제서야 그 거지는 교황님의 고해를 들었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자신의 고해를 들어달라고 교황님께 간절히 청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흐느껴 울었답니다. 고백성사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에게 어떤 성당 앞에서 구걸을 하는지 물으시고는 그를 그 성당의 보좌신부로 임명하고 거지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고 거지보다 더 불쌍한 죄인들의 죄를 세탁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당부하셨답니다. (가브리엘통신)



                         <니들이 고해성사를 알어?>


   요즘 서로 대선자금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라고 정치가들이 촉구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저도 모르게 "니들이 고해성사를 알어?"라는 다소 불손한(?)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고해성사(Sacramentum poenitentiae)는 세례을 받은 신자가 세례를 받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으며 교회와 화해하도록 해주는 성사이며, 고해성사를 준비를 하는 과정으로 잘못을 알아내는 성찰, 알아낸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는 통회, 앞으로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지혜로 계획하고 마음을 정하는 정개, 그리고 충실한 고백, 보속에 대한 충실한 실천등이 이루어져야 참된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기고 형식적이거나 눈가림식으로 고해성사를 한다면 또하나의 독성죄 즉, 모고해(Confessio sacrilega)라는 죄를 짓게 됩니다. 대선자금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겠다는 정치가들은 이를 참조하여 고해성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가브리엘통신)


                              <일치: CO-INCIDENCE>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고백소입니다. 우리 땅 곳곳에서, 세상 구석구석에서 숱한 범죄가 발생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의견으로, 서로 다른 피부색깔 때문에, 서로 다른 이념으로, 서로 다른 종족 때문에, 라디오, TV 등을 통해 보도됩니다. 극과 극의 관계 안에서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삿대질하면서 서로 폼을 잡는 꼴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꼬라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세상의 죄들을 안방에 앉아서 보고 듣습니다. 그러니 너나 할 것없이 우리는 고백소 안에 앉아 세상의 죄 고백을 듣고 있는 사제입니다. 이제 사제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보속과 사죄경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어떤 보속을 줄까 하고요. 어떤 보속을 마련해 주고 사죄경을 선물로 주시겠습니까?

   저는 Co-incidence 즉 일치를 보속으로 주고 싶습니다.

   보나벤뚜라 성인은 말합니다. 극과 극인 것이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과의 만남,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과의 만남, 오목한 것과 볼록한 것과의 만남, 그렇게 서로 전혀 다른 둘이 만납니다. 그리곤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보나벤뚜라는 'Co-incidence'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둘이 하나가 되긴 하지만 어느 하나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거나 먹어 치우지도 않습니다. 각기 자신의 꼴을 그대로 지니면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Co-incidence입니다. (민신부님의 ‘하늘로부터 키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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