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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내 방식보다 중요한 메시아의 방식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15 조회수1,398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12월15일(수) -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7,18b-23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불러서 19) 주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20) 그 두 사람이 예수께 가서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선생님께 보내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십니다.”고 말하였다. 21)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도 뜨게 해 주셨다. 22)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복음산책]  내 방식보다 중요한 메시아의 방식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루가 3,19-20) 그 이유는 요한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필립보(마르 6,17)의 아내 헤로디아를 처로 맞아들인 일과 그 밖의 잘못을 들어 자기를 책망했기 때문이다. 성서는 헤로디아가 필립보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여부를 밝히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내 10명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3세들에 의한 족보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헤로데의 족보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감금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종결됨과 동시에 메시아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물론 예수님의 세례는 그 직전에 있었던 일로 보아야 한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님은 40일간의 광야 대피정을 하셨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셨다. 우선 고향 나자렛에서 이미 구약에 예언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다. 이 은총의 해는 단식과 기도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던 선구자의 시대와는 달리 이미 도래한 메시아의 현존을 축하하는 잔치와 구원의 시대를 말한다. 메시아 시대의 잔치와 구원은 첫째, 마귀 들린 사람들과 갖가지 병과 불편함으로 고통 받던 수많은 병자들이 성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생명을 되찾는 기쁘고 놀라운 일로 드러나며, 둘째, 어부들과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고, 이들에게 하늘나라와 참된 행복을 가르치는 복음으로 충만 된다.(루가 4,1-7,17) 메시아의 시대는 안식일의 주인, 즉 율법을 내린 주인으로 군림하는 예수님 스스로가 아버지로 모시는 창조주이시며 유일한 하느님의 권위로 보장된다.(이사 45,6-25; 제1독서 참조)


  세례자 요한은 이 모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시커먼 벽에 촘촘한 창살과 어둡고 칙칙한 공간, 사해 동쪽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에 갇혀있다.(플라비우스, 유대고사 18,116-119)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광야에 쏟아 부은 사람,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태어난 사람, 세례자 요한이 이제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고, 하늘나라가 도래한 표징도 전해들었을 뿐, 확실하게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감옥은 광야에서만큼 생각하기에 좋은 곳이다. 감옥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며, 질문을 던지고 의문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메시아를 위한 선구자로서 그 길을 닦고 밝히며,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던 일이 다 무엇인가? 감옥이라는 거동의 제한을 받는 공간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반신반의(半信半疑)의 질문을 던진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20절) 우리는 선구자의 의심과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또한 삶의 기로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또 선택한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문을 던지며 의심을 품는가? 이것일까, 아니면 저것일까 하는 갈등 말이다.


  세례자 요한만큼 그 제자들도 의심과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20절) 이 질문은 우선 세례자 요한의 질문이었고, 동시에 그 제자들의 질문이며,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질문이며, 오늘날 현대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이 이렀다면 대답은 통상 “맞다-아니다”라는 둘 중 하나다.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대답을 내리시기 전에, 단 한 구절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을 보도한다.(21절) 루가의 세심한 배려이긴 하지만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기적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보아왔던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22절)는 것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는 것이다.


  결국 갈등과 의심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메시아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했다. 그 덕에 메시아 또한 이 땅에 도래했다. 그런데 갈등과 의심이 웬 말인가? 그것은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가 다른 관점에서의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은,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고, 나쁜 자들을 발바닥에 재처럼 모조리 짓밟아’(말라 3,2.3.21), ‘새로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이사 59,15-66,24) 그런 메시아를 고대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지상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에 가졌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의 모든 예언과 징표가 당신 자신 안에서 서서히 성취됨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단지 예수께서 선택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내 방식이 아니라 메시아의 방식이요, 하느님의 방식이다. 이스라엘과 세상의 모든 백성은 바로 메시아의 방식대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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