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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2) 교장 선생님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16 조회수850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04년12월16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ㅡ이사야54,1-10;루가7,24-30ㅡ

 

          교장 선생님께

                           이순의

 

 

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벌써 또 한 학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청춘의 끓는 피를 발산하느라고 충돌을 불사하며 지냈을 아이들을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어머니들의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자모에게도 많은 기회를 부여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일반적으로 학부모님들은 여러가지 발이 서야 학교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사회적 여건이 출중하거나, 아니면 얼굴이 두껍거나, 심지어는 말 발이 세거나.....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타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자식이 공부를 잘 하지도 못 하고, 경제력은 도시빈민에 속하며, 사회적 여건은 명함도 없고, 얼굴도 두껍지 못하며, 잘난 게 없으니 말 발이 먹히는 입장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신 학교측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교장 선생님!

오늘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언론에서는 수능부정 행위가 오르락 내리락하고 자식을 둔 부모네들은 다양한 각도의 시각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번 기말시험에는 우리 학교에서도 자모들을 시험 감독관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꺼이 응답했으므로 저는 자식의 학교에서 시험감독을 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막상 지명을 받고보니 생각이 많았습니다. 교실을 앞뒤로 왔다갔다 해야할지? 양옆으로 왔다갔다 해야할지? 또 컨닝을 하는 학생을 발견하면 어떻게 적발을 해야할지? 혼자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있으시다는 어머니들께 전화를 하여 여쭙기도하고, 자녀의 입장과 부모의 입장 모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두 과목의 시험감독이었지만 제게는 상당한 생각에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막상 당일 아침에는 시내버스 시간배정을 잘 몰라서 버스정류장에서 40분 이상을 지체하는 바람에 감독관 집결시간에 유일하게 지각을 해버린 엄마가 되어 민망했습니다. 그래도 택시를 타지 않은 이유는 버스는 전용차선제가 있어서 택시 보다는 빠를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적중했고, 다행히 시험감독을 못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교장 선생님!

저는 이른 아침의 시내버스를 경험하며 아들의 수고를 새삼 느낄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차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 조카녀석들도 아침시간이면 부모네가 운전기사인 경우를 쭉 지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집에는 차가 없기 때문에 새벽 어두운 시간에 집을 나서는 아이는 작은 아침도시락을 책가방에 넣고 학교에 갑니다. 어느 날은 길이 막혀 버스가 제 간격대로 오지 않아서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만큼 내 아이에게 절박한 시간일지는 제가 짐작하지 못하고 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시험감독을 가던날에 그 다급함을 훈련받기라도 하듯이 버스는 오지 않았고, 늦게 온 버스는 사람을 짐짝처럼 구겨 넣었습니다. 아~! 내 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며 학교에 가는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문앞에서 교실까지의 언덕이 얼마나 멀든지요. 다행히 출근하시는 직원분의 차를 세워타고 간신히 교육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_^)

 

물어물어서 배정 받은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예뻐보인다는 것이고, 젊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교실에서 시험을 기다리고 있는 초췌한 학생들이 모두모두 예뻐 보였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젊음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당당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듬직한 두 분 선생님께서 잘 하고 계시는데 제가 끼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까지 불편하게 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은 학생들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방해꾼이 되지 않도록 감독하느라고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자리에서 느끼는 것은 나는 엄마일 수는 있으나 선생님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선생님도 선생님일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다른 누구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험종이 울리기 전에 소지품은 모두 교실 뒤의 사물함 위로 물리도록 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외투까지 벗어서 물리고 있었습니다. 어미된 입장에서는 그 학생에게 추우니까 외투는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감독 선생님은 두 분이셨고, 정감독 선생님은 앞에, 부감독 선생님은 뒤에 서 계셨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때와는 다르게 이색적인 풍경은 선생님들께서 수정용 화이트를 들고 다니시면서 손을 드는 학생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필통을 올려두지 못 하고 컴퓨터용 싸인펜만 책상위에 있으므로 지우개를 선생님께서 일일히 가져다 주는 장면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들었던 반에서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불상사가 있었다고 해도 저는 학생을 적발하는 감독관은 될 마음이 없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제게는 그 시간이 너무나 무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앞을 보자니 선생님께서 앞에 떡 버티고 계시니 든든하고, 뒤를 보자니 또 선생님께서 뒤에도 떡 버티고 계시니 든든하고, 마치 두 분 선생님께서 시험감독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감시하러 온 학부형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기에는 조심스러워서 몸둘바를 모르겠더이다. 두 분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잘 도와주시는데 공연히 걸리적 거리지나 않을지 조심하느라고 간이 콩알만 했습니다. 그래도 행복은 했습니다. 내 자식이 이런 모습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흥이 돌았습니다. 제게도 학창 시절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의 성장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시험이 종료되고 교실문을 나와서 교실의 앞문 복도에 서 있었습니다. 함께 시험감독을 했던 선생님들이 나오시면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한 마디의 인사는 드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두 분 선생님께서 답안지를 들고 나오셨을 때는 마음 가득히 담아서 인사를 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라고!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어머니들끼리 모여서 평가시간을 마련하셨더군요. 교감선생님과 담당선생님께서 질의에 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시험감독에도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의 테두리에서 답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칙에 의해서 정해진 법으로 모든 규율의 질서를 요구하시고 있었습니다.

 

시험시작 1분 늦은 학생이 입실을 못 하는 것에 대하여 어머니들은 1분으로 보지만 학교는 31분으로 본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습니다. 수업시작 30분 전까지 교실에 입실을 해야한다고 정했으면 학생은 30분 전까지 학교에 와야 한다는 것이 질서라는 것! 그러나 어머니라는 모성은 또 1분으로 보기 때문에 입실을 시켜 주어야 되지 않는가? 라는 온정이 앞선다는 것! 시험을 치르지 못한 학생에게는 0점 처리 하는가에 대하여 교칙에 따라서 전에 본 시험 성적의 몇 퍼센트를 준다는 구제방법에 대하여도 교칙과 선례를 거친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구제 하는 방법들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들에 대하여도 신기했습니다. 교육을 하다가 발생하는 많은 시행착오들이 교칙이 되고 법령이 되어 발전해 왔고, 그런 규칙과 질서 안에서 상호 존중과 백년 대계를 이루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험종료 시간까지 문제지에는 풀이를 다 했으나 답안지 작성이 늦어져서 기입을 하던 중에 마치는 경우는 어떤 대책이 마련되어지는가? 그 학생을 구제할 것인가? 시간이라는 규칙에 공평할 것인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현실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그자리에서 답안지 작성은 허용을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대두 되므로 단순하게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 딱 감고 답안지를 작성하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이지 누구를 감시 하겠다고 감독관이 된다는 것은 제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몫이었습니다. 제 바람은요. 답 몇개 못 쓴 학생은 쓰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독관의 결격사유에 충분히 해당됩니다. 앞으로는 급식 봉사는 해도 시험감독관은 하지 않겠습니다. 교장선생님!

 

학부형 시험감독제를 계속 유지 할지에 대하여는 양분이 되었습니다. 부정한 학생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말하는 자모님도 계셨고, 열 주인이 한 도둑을 못 잡는다고 아무리 감시를 해도 하려고 하면 한다는 의견과 함께 감독 선생님이 두 분씩이나 계시는데 학부형 시험 감독은 선생님들을 믿지 못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후자에 찬성을 합니다. 더구나 저는 제 앞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점수 몇 점이 인생을 바꾸지 않더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부정행위 몇 점을 얻어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거나 그 몇 점을 빼앗겨서 거지로 전락하지는 않으니까요. 단지 당장의 점수에는 마음이 상하고, 또한 친구들끼리는 누가 부정을 했는지 다 알고 있겠지만, 멀리 본다면 어머니들까지 나서서 감시해야할 만큼 우리 아이들을 어둡게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선생님들이 앞뒤로 두 분씩이나 계시는데 어머니는 어디에 서서 감독을 하지요? 가운데 서서 해야하나요? 

 

교장 선생님!

제가 학교에 다닐적에도 친구가 제 앞에서 교과서를 펴 놓고 보라고 하며 답을 적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동조를 했다면 분명히 몆 점은 더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그 친구의 인생이 그 점수를 따르지 못 하고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시험을 보았던 저는 잘 살아야지요? 그러나 삶은 무엇이 잘 사는 것이고 무엇이 못 사는 것이라고 가늠할 수 없듯이, 인생 또한 누구의 인생은 좋고, 누구의 인생은 나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 총수에게 시집을 갈 때는 잘 살겠다고 기자회견까지 했지만 이혼을 불사하고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가는 연예인을 보면 갖춤이 많다고 만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 짝궁처럼 무일푼에 무학이었던 사람은 갖춤이 부족하여 맨날 허덕이는데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인생이란 한 순간에 사생결단이 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엄마일 수는 있으나 감독관 일수는 없었나 봅니다.

 

학교가 유지 되어오면서 많은 제도와 교칙을 정착시켜 왔듯이 저의 학부모된 입장은 그것들을 믿고 지키면서 선생님들을 신뢰하는 것이 더 큰 교육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약에라도 기업형으로 악심을 품고 이루어지는 부정행위가 교실에서 조차 발생하게 될지에 대하여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상사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두 분 선생님들의 감독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특별한 어려움이나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자식이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친구들 사이에 일원이 되어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의심한다면 제 자식이 얼마나 불행한 세상을 살고 있는지요? 제 자식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의 세상에 속한 또다른 뜨거운 피라고 믿습니다. 아직은 칩이 장착된 기계인간의 세상이 오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들이 풍성한 사람다운 세상에 제 자식이 살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자식 하나를 두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고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자가용이 넘쳐나는 세상에 자가용 없이 가난한 엄마아빠를 사랑해 주는 아들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차가 없다고 불평한 적도 없었고, 집이 좁다고 싫어한 적도 없는 자식을 두어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집이 제일 편하다는 아들의 둥지는 이렇게 못난 부모이니까요. 장정이나 다름 없는, 기운만 남아도는 억센 자식들을 돌보아 교육하시는 학교측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자모님들의 선입견처럼 내세울 발이 없는 저 같은 학부형에게도 고른 기회를 부여해 주심에 다시 또 감사합니다. 곧 방학이 다가올 것이고 학교는 정적만이 감돌 것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뿌리는 새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겨울동안에 선생님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면서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늘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2004년12월16일 밤에 자모 이순의올림

 

제 아이는 지금 시험이 끝나서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외출한 두 칸 방이 휭하여 싫습니다.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좁은  공간도 그 아이가 있어야 꽉 차는가 봅니다. 그것이 어미의 가슴이겠지요?! 영화가 끝나고 아들이 돌아오면 썰렁한 방안도 온기가 돌고, 제 가슴도 훈훈해 질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ㅡ사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 크다. 루가7,28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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