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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3) 한 수 배웠습니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18 조회수830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4년12월18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ㅡ예레미아서23,5-8;마태오1,18-24ㅡ

 

      한 수 배웠습니다

                             이순의

 

 

나는 가끔 집 주인 아주머니와 장시간의 대담을 할 때가 있다. 열렬한 그리스도의 성도이시며 개척교회를 설립하셔서 직접 운영하시고 계신다. 그러니까 우리집에는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위층 아래층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집이다. 사모님은 꽃과 나무를 사랑하시며 예수님을 믿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신다. 그래서 나도 가끔은 사모님과의 대담을 기쁜 마음과 신중한 자세로 임하고 있다.

 

엊 그제 전화가 주인집에서 여러번 왔다는 소리를 듣고 수도요금을 계산 하시려는 줄 알고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블라우스 세 장을 주시며 입으라는 것이다. 가끔 얻어 입어서 죄송한데 또 주셔서 사양했지만 권하셔서 감사히 받았다. 옷은 헌 옷이 아니고 새 옷이다. 이번에는 큰 치수도 한 장 받어서 어머니도 한 장 드려야겠다. 사모님은 가끔 세들어 사는 사람 뿐만 아니라 주변에 이런 나눔을 잘 하신다.

 

성도님 중에 옷공장을 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주시는 옷은 편하고 잘 맞아서 잘 입는다. 엊 그제가 아들의 생일이어서 시루떡을 조금 싸서 가지고 가서 드시라고 권했더니 기특해 하신다. 사모님은 한 번도 직접 떡을 해 보신적이 없으시다고 하신다. 그 또한 얼마나 신기 하시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또 깊은 영성을 나누기 시작 했다.

 

사모님과 나는 상당히 깊은 영성을 나눈다. 탁월하신 사모님의 성덕만큼이나 역사하심이 주류를 이루지만 나는 간혹 양념이 될 만큼의 질문과 답을 하면서 좌담이 이루어진다. 말씀이나 신앙의 역사는 그 기초가 성서를 바탕으로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이의를 제시하거나 의문을 가질 내용이 없으시다. 개신교에서 인정하는 성서 66권을 가톨릭에서 공유하고 있으므로 별다른 이견없이 잘 듣는다. 

 

그렇다고 무지한 개신교인들처럼 막무가내의 그런 신자는 결코 아니시다. 성서 몇 구절 외워서 가톨릭 자체를 이단화 하는 그런 무지막지한 신앙인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모님과 대화를 하고 돌아온 날은 내 자신이 사모님 만큼 활동적이지 못함을 반성하게 된다. 당신께서 개척한 교회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시고, 또한 목회로 5대를 전수하신 친정 가문에 대하여도 크나큰 자랑을 삼으시는 분이시다. 그만큼 구원신앙에 확신을 갖고 계신다.

 

내가 사모님과의 좌담중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내심이 있다. <내가 만난 천주교인은 구원에 확신이 없다.> 내색은 안하지만 그 소리를 하실때 내 속 마음이 가장 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구속사업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는 것 처럼 부자연스러운 신앙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천주교인들은 구원에 확신이 없다기 보다는 성찰 위주의 신앙교육에 더 비중을 두어 교육을 받은 탓인지 강색구속 보다는 상선벌악이라는 개념에 더 일상화 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천주교회의 절대적으로 믿어야하는 기본 4대 교리중에 천주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구속이 있다. 의식이 남아있는 중환자가 대세를 받을 때도 이 4대교리는 믿어야만 세레가 집행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교가 인정해야할 교리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는 이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톨릭인들은 강생구속의 개념적 확신을 발설하지 못한다.

 

가슴 속에서는 구원신앙의 확신이 깔려있다고 해도 성찰의 입장으로 돌아가 개념을 나열할 용기를 상실하는 것이다. 천주존재와 삼위일체와 강생구속이라는 보상의 원인들이 상선벌악이라는 틀 안에서 실천하고 덕행하고 참회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성찰의 개념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나 자신이 성찰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나누고 일치하기를 바라셨던 우리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될 것이다.

 

그러나 간혹은, 때로는, 질긴 독종을 만나게 되면, 천주교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악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샤머니즘적 전통종교에 세뇌된 선한 삶에 대한 무한한 혈통의식에서 그 뿌리가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개신교인이 본다면 분명히 이 내용은 샤머니즘을 배척하지 못한 이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조상대대로 두고 쓰시던 어른들의 잔소리에서도 착한 사람에 대한 가르침은 인호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심지어 전례동화의 주류를 이루는 무능하리 만큼 바보스러운 흥부라든지 심청이라든지 팓쥐라든지 그 태내에서 부터 내려온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혼을 일구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교회의 모든 신앙인은 구원을 믿으며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결과로 구원 받는다는 확신이 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보장받는다고 해서 샤머니즘적 민중종교인 만큼도 선행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주님께서 십자가 형틀의 보상을 나누어 주실지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우리 가톨릭신자들의 부족한 표현에 대하여는 인정을 하지만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부정에 대하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그 부분에 대하여 모르고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도 않는다. 우리 가톨릭은 그리스도교이며 예수의 십자가의 결과로 확실한 구원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우리교회의 각자각자의 신앙심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주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의 대화에서도 나는 사모님의 깊으신 성덕에 한 수를 배우고 왔다.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예시를 들었을 때 사모님은 나에게 단호히 지적을 해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성자는 아버지 하느님 성부의 피조물이 아니시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므로 피조물이 아니신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사용하고 있는 예시는 마치 아버지의 피조물이신 예수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이 잘 못 된 예시이며 고치겠다고 말씀 드렸다. 내가 한 예시는

 

<연필이 있습니다. 연필이 있는데 연필을 만드는데는 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연필을 만든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연필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연필은 예수님 성자이시고, 연필을 만든 사람은 아버지 성부이시며, 연필을 만드는데를 본적도 없고 연필을 만드는 사람도 본적이 없는데 연필만 보고도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는 것은 성령입니다.>였다. 이 예시에서 보면 연필은 만든 사람의 피조물이지 하느님 친히 내려오신 동격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이 예시를 써 왔다.

 

결코 교리에 오류를 발생할 생각은 없었으나 분명한 오류를 낳고 있었다. 종교의 이단이란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었다. 말씀이 원하는 방향과 다른 해석을 할 때 그것은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잘 못 된 예시라고 인정을 했다. 그리고 사모님의 삼위일체 예시를 들어 보았다. 사모님은 설계도를 예시로 들었다.

 

<설계도면이 있습니다. 그 종이 위에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건물을 지을 사람이 설계도를 그리기로 합니다. 그런데 설계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설계사를 데려오고 설계사는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근사한 그림이 완성이 됩니다. 그렇다면 설계도면이 필요한 건물주는 아버지 하느님이시고, 설계를 그려서 건물을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 이시며 설계도만 보고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고 믿는 것이 성령이며 그 설계도면도 건물도 더불어 살아야하는 피조물, 곧 우리 자신입니다.>라고 하셨다.

 

맞다. 설계도만 가지고도 건물은 없고, 설계도 없는 건물은 무너질 것이며, 보수를 하려고 해도 어디를 해야할지를 모르게 된다. 피조물은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 내 예시가 틀린 이유는 반드시 존재해야할 피조물이 빠졌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되어 그 가운데 있어야할 그 백성이 없다면 그것 또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도 고쳐본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화가가 연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연필장이가 되어 열심히 연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그 화가는 아버지 하느님 성부이시고, 연필장이는 그리스도 예수 성자 이시며, 그림을 보고 화가도 있고 연필장이도 있다고 믿는 것이 성령입니다. 연필과 종이는 도구로 쓰여진 피조물이고 그림 또한 멋진 피조물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표현인 것 같다.

 

나는 사모님의 신앙심에 뒤진다는 소리를 불허할 만큼 가톨릭을 사랑하는 종교인이며, 그리스도의 고통의 대가로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인이다. 쓰실곳이 많다고 하시며 사모님은 슬쩍 개종을 권면 하셨다. 나는 내가 가톨릭의 세례를 부정하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사모님의 종교를 선택 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늘 그리스도교의 뿌리인 가톨릭을 배제시키는 많은 그리스도교를 대할 때면 가슴이 아파온다.

 

지금 돌아와 함께하자고 권면해야할 본인들은 가톨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인 중세교회의 부패의 결과로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교는 그들이 인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그 뿌리가 가톨릭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마음 속으로 희망하며 떨어져간 형제요 자매인 사모님의 그리스도 신앙에 찬사와 함께 존경을 전하고 싶다.

 

사모님!

한 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ㅡ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1, 23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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