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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5) 시룻 번을 먹으며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20 조회수972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4년12월20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ㅡ이사야7,10-14;루가1,26-28ㅡ

 

     시룻 번을 먹으며

                         이순의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 점심을 잘 먹고 좌담도 즐거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가늠하지 못 해서 입고 간 옷이 좀 얇았다. 그래도 마음의 무게를 실어 만나야하는 벗님들이 아니었기에 이물없는 마음으로 유쾌하게 다녀왔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서는 나를 맞아주는 하얀 물체가 있었다. 별로 관심도 없이 방치해둔 야속함을 만회나 하려는지 눈 길을 놓아주기 않았다.

 

뻐석뻐석 말라서 가뭄의 논 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고, 거칠기로 말하면 고목의 마른 껍질과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단단해서 촉기라고는 느낄 수가 없다. 몇 일 전에 아들의 생일 떡을 했다. 시루에 떡을 앉히고 시루뺀(시룻 번의 전라도 사투리)을 붙였다. 떡이 익고 살살 칼 집을 넣은 다음 시루를 떼서 상에 놓았다. 시루에도 솥에도 시루뺀이 반 반으로 나뉘어 붙어있다.

 

손으로 일일히 떼어서 그릇에 담아 두었다. 겉은 하얀 쌀가루가 그대로 이지만 속은 잘 익은 인절미 속살이다. 겉은 딱딱 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다. 나 어렸을 적에 엄청나게 큰 가마솥에 옹기 시루를 걸고 어머니는 떡을 하셨다. 부엌문이 야속하리 만큼 떡은 더디 익었고, 또한 신령한 정성 이라서 부정을 막아야 했다. 그래도 떡은 나중에 차례를 지내고 먹더라도 시루뺀은 한 덤텡이 얻어 먹어야만 했다.

 

지금의 스텐 찜솥에 붙이는 실 같은 시루뺀이 아니었다. 구렁이 몸통만큼은 굵은 시루뺀이었다. 어린 고사리 손에 가득차고도 남는 굵기였다. 밥만 먹어 본 사람은 생쌀이 무슨 맛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생쌀도 씹으면 씹을 수록 진한 맛이 있다. 생쌀만 먹어 본 사람이 벼 이삭을 까 먹는 농부의 입질을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러나 농부는 논둑에서 쉬는 동안에 쉬지 않고 벼 알갱이를 까 먹는다.

 

그랬다. 시루뺀도 시루뺀의 맛이 있다. 완전히 잘 익어서 고물과 함께 궁합을 이룬 떡 맛은 아니다. 그렇다고 덜 익은 생쌀 가루의 맛은 더욱 아니다. 잘 익은 인절미와 완전히 덜 익은 생쌀 가루의 궁합이다. 그 맛을 잊어가고 있다. 시루뺀 한 조각 얻어먹으려고 부엌 문지방이 닳았었는데.....! 아들에게 먹으라고 시루뺀을 떼서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시루뺀은 이리 비키고 저리 비켜져 빼들빼들 말라있다.

 

그 맛을 알리고 싶은 아들에게 마르기 전에 먹어두라고 들여 놓은 어미가 착각을 한 것이다. 결국 오늘 외출을 하고 돌아와 시루뺀 담긴 접시를 앞에 놓았다. 말라서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시루뺀을 집어서 깨물었다. 꼭꼭 씹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은 살아났다. 떡의 달큼함과 쌀의 텁텁한 맛이 배합되어 잘 씹혀졌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아들은 이 맛을 모르지 않는다. 어려서 부터 조금씩이라도 먹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지방에 버티고 서서 기다리는 맛이 아니었다. 그것이 문제다. 떡 익는 냄새가 떡 맛을 알려 주듯이, 시루뺀을 먹고자 갈망하는 기다림의 상실이 이미 귀한 맛을 잊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만드는 떡이 거의 없다. 방아간에서는 시루뺀을 붙여서 떡을 하지 않는다. 엄청나게 뜨거운 증기 압력으로 떡을 익혀버리고야 만다. 시루뺀을 붙이면서 떡이 설지 않고 잘 익게 해 주시라고 비는 염불조차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내가 떡을 해 보았더니 찰가루는 떡이 잘 익지 않는다. 반면에 모가루는 떡이 잘 익는다. 찰가루와 모가루의 차이는 맛에서 부터 귀티가 다르다. 어머니들은 부정탄다고 시루를 붙인 화덕에 물을 떠서 빌어 가며 군불을 조절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 다행히 나는 하느님을 믿어서 부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안 익는다고 물을 떠다가 가스불 옆에 놓고 빌지도 않는다. 나만의 방법이 있다.

 

긴 젓가락으로 꾹꾹 쑤셔서 안 익을 것 같으면 젓가락을 돌려서 아래 솥에서 올라오는 직행으로 구멍을 낸다. 젓가락 두개 정도의 구멍을 아래까지 뚫어 놓으면 엄청난 뜨거움으로 김이 직행을 하고 올라온다. 떡이 안 익고 배기겠는가?! 그래서 떡 익는데는 근심 할 일이 없다. 혹시 모르겠다. 시재를 모시느라고 굄사를 해야하는 떡이라면 구멍난 떡은 명합도 못 낼 일이지만 자식놈 생일 떡 해서 예수님하고 나눠 먹을 건데 한 번도 예수님께서 구멍 났다고 혼낸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찰진 떡을 어쩌면 이토록 잘 익혔느냐고 칭찬만 들었다. 히~~! 뭐 시제를 모실 떡은 양이 많아서도 집에서 하지 않으니까 구멍 낼 일도 없다. (시루뺀 이야기가 삼천포로 갔습니다.헉~) 아!

떡이 설지 마라고 시루뺀을 붙이면서 공을 드리는 그 멋을 우리는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아들은 그 귀한 맛을 방치해 놓았고 어멈 혼자 시루뺀이라는 글을 쓰며 다 먹었다. 맛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꼭 좋은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늘 그러했듯이 나는 오늘도 예수님과 앉아서 도란도란 시루뺀을 나누어 먹었다. 새 날이 곧 열릴 것이다. 아기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시지 않는다. 완성하러 오신다. 구약을 뜯어 고치고 무시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완성하러 오시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얼마나 완성하며 사는가? 마리아와 같은 순종의 덕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 아들은 시루뺀을 먹지 않았다.

 

ㅡ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1,31-33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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