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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다른 아이들은 구하지 않았나요?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28 조회수879 추천수4 반대(0) 신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말씀(1요한 1,5-2,2; 마태 2,13-18)

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다른 아기들의 목숨은 버려두고 자기 아들만 구한 것에 대해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 소설의 밑바탕에는 하느님은 왜 무고한 어린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지, 과연 그런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인지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신자라고 해서 한번쯤 이런 회의를 품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맡은 예비자들도 성서필사를 하면서 궁금하다며 질문도 하였다.

먼저 우리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고 있다.
성서저자는 예수의 어린 시절의 성장배경이나 공생활의 업적을 시시콜콜 전해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유년 사화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복음사가가 예수를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의 신앙고백을
몇 개의 그럴듯한 이야기 안에 듬뿍 담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의 어린 시절이 역사 보도문(예수의 전기)이라고 생각한다면
각 복음서가 전해주는 유년기 이야기 중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각 복음서는 복음사가 나름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형식에 담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이야기형식은 유다민족들이 즐겨쓰는 표현방식이다)

마태오 복음에서의 예수의 유년기는 다섯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즉 ’예수 탄생예고’, ’동방 박사들의 예방’, ’에집트 피난’, ’아기들의 집단 학살’,
’에집트에서 돌아옴’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는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는 복음이다.
유대인 독자라면 이 제목들과 내용들만 보아도 연상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자기 민족의 영웅, 위대한 모세의 일생과 아주 흡사하다.

당대 최고 통치자인 파라오의 명령으로 히브리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에집트 궁정에서 자라난 모세.
당대 유다의 통치자인 헤로데왕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려는 위기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에집트로 피난가는 예수.

미디안 사막에서 더부살이하던 모세는 잔혹한 왕이 죽자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러 돌아온다.
예수 역시 잔학한 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버지 요셉의 도움으로 자기의 백성이 사는 곳으로 돌아온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는 천사의 예고를 이미 받은 바 있다(1,21).

자, 이제 마태오복음사가가 그분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와 예수는 가장 강력한 인간(왕)의 잔혹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구출되어 하느님의 보호로 자라나 백성을 구원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결코 모세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속해있는 유다인 공동체 안에 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세의 기억을
끌어다 말함으로써 보다 쉽게 그분을 이해하도록 모든 힘을 다한다.
또 예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상을 심어주려 주력한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서는 모세와 연관된 구성이 눈에 띈다.
다섯 개의 긴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 전체도 그렇지만
다섯 개의 유년기의 에피소드 역시 모세 오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 ’열개의 말씀’(십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산에서 스스로 복된 말씀(하느님 백성이 살아야하는 대헌장)을 반포하시는 주님이시다. 

이제 이런 시각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본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가장 어두운 시기인 바빌론 유배 당시,
학살당한 자식들의 어머니들의 참혹한 울부짖음이 회상된다.
유배는 제2의 종살이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역하고 지은 ’죄의 응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복음사가는 바빌론 유배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예수께서는 이러한 죄의 종살이로부터도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모세를 능가하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유다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의 끝을 모두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맺는 것도
성서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유년사화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어떤 분으로 신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을 다 놓아두시고
왜 아기 예수만을 구했는가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고,
한 명의 구세주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가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무고한 어린이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날을 정했을까?
다만 오늘 성서말씀을 통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또는 무관심 속에서 무고하게 학대받고 버려지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고 있는 무력한 어린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되고,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낙태되고 있는 죄없는 아기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을
오늘 복음에서 들어야한다.
그 책임은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 사람에게 있음도 분명하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부도덕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 다른 헤로데가 되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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