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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2월 29일 『야곱의 우물』- 구원을 보는 사람 ♣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29 조회수1,171 추천수10 반대(0) 신고
     
    ♣ 구원을 보는 사람 ♣
    
    [루가 2,22-35]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에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 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 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 습니다.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찌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 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는 그동안 이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을 할아버지로 알았다. 언제부터 이런 착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종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 때문이었을것이다. 당연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니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이, 내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이 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나, 내 생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확신까지 하는 나는 아무리 봐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새로운 시므온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덨던' 사람, '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성령께서 친히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시므온을 만날 수 있었다. 아주 확실하게.
    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구원을 보는 것,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보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이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곱의 우물』 《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12월 29일자 《새터 교회》 박 후임 목사님의 글입니다. *^^*
    【 묵 상 나 누 기 】

† 시므온 †

시므온!.
시므온. 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박 목사님처럼 [안나]도 시므온을 할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묵상 글을 통해서 시므온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참 감사드립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덨던' 사람, 
'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

한 줄 한 줄 곱씹어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인지..느껴집니다..
숨이 멈추는듯 눈길을 뗄 수 없는 귀절이 있습니다. 

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구원을 보는 것,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때문에 살고있는가.
끝없이 꼬리에 꼬리가 이어집니다. 무엇때문에 살아 가고 있는가!
앗! 나도 시므온처럼 '구원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서 숨이 끊어지는 날에 시므온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언제나 앞서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한 치 뒤로 물러서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요. 양보가 안됩니다.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고집스러워갑니다. 나이 핑게되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내 생각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털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것을 보면서도 눈을 감아야합니다. 내 시간과 내 물질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경건하게 살아야 되는데.../조금만, 아주아주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이 있으면 기도하기를 쉬어버립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머무르시도록 내 성전을 깨끗이 치워 놓아야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내 안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기에는 분함과, 섭섭함, 그리고 너그럽지 못함들이 아직도 그득합니다.
2004년 12월의 끝자락에서 마음에 닿는 詩 한 편을 야곱이 홈피에서 읽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에게 배달된 시 입니다 시와 함께 시 해설까지 ....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시인의 한마디가 겨울에 맨몸으로 나서게 합니다 ▶ 부드러운 칼 - 정호승 詩 ◀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짧은 시간 동안』외 간행.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해설》 칼 권하는 사회다. 신문을 읽다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거리의 노숙자를 내려다보다가, 응급실 촌로의 궹한 눈망울을 바라보다가, 직장 상사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불쑥불쑥 권하는 칼 한 자루.
    평생 나를 이끌고 온 욕망의 칼, 격정의 칼, 분노의 칼.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내 모든 생의 그런 아픔을 다시는 헤엄쳐 돌아올 수 없는 갈대숲 너머로 던져버린다.
    좌절과 패배와 방관이 아니다. 더욱 날 사나운 비장의 무기를 챙기기 위해서다. 그것은 눈부신 햇살에 자꾸 자꾸 부드러워지는 희망과 미소의 비수.
    한번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두 번 읽으면 그 뜻이 헤아려지고 세 번 읽으면 내 것이 되어버리는 시. 그게 정호승의 시다.
    지난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누군가를 향한 칼을 갈고 있었다면 오늘 아침 그 칼을 한번 버려보자.
    칼을 버린다고 칼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잠시 빼앗긴 욕망의 집에서 칼을 놓아주고 먼 훗날까지 반짝반짝 빛날 나를 찾는 것이다.

성령님을 내 성전 안에 모시려니 칼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시므온!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면 내 마음이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깨끗 해야 하는데/내 안에 이런저런 칼들로 인하여 성령께서 머무실수가 없으니.../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평탄하지가 않습니까... ㅠ.ㅠ 시므온 처럼 내 존재의 이유도 '구원을 보는 것'이어야 하기에... 한번 읽으니 내 모습이 보이더니 두 번 읽으니 그 뜻이 헤아려지고 세 번 읽어서 내 것이 되어버린 詩. 정호승 님의 『부드러운 칼』이라는 詩. 고운 詩와 함께 칼들을 내던지며 2004년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고 싶어서 입니다...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서 입니다.
놓아야 될 끈들은 스르르 내려놓겠습니다. 칼도 집어 던지렵니다. 순간순간 깨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먼저는 내 자신에게 간절히 외치며 묵상을 나누는... 그래서 요즘따라 밥을 많이 먹는... 뚱녀 [안나]가요*^^* 《소스입니다. 필요한 부분들만 양념하셔서 나눠가지셔요.》 <ul><img src=http://www.cdmb.co.kr/pds/004/10/j104.JPG> <pre><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2pt"> <b>♣ 구원을 보는 사람 ♣</b> <FONT color=green style="FONT-SIZE: 11pt"> <b>[루가 2,22-35]</b><FONT color=red style="FONT-SIZE: 10pt">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에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br>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br>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br>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 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br>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 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으로 데리고 왔다. <br>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u>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u>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 습니다.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br>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찌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 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는 그동안 이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을 할아버지로 알았다. 언제부터 이런 착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br> 아마도 "…이 종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 때문이었을것이다. 당연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니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이, 내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이 었을 것이다. <br>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나, 내 생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확신까지 하는 나는 아무리 봐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br> 하지만 덕분에 나는 새로운 시므온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45928;던' 사람, '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br> 성령께서 친히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시므온을 만날 수 있었다. 아주 확실하게. <br> 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구원을 보는 것,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br> 내 생각으로 보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이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br> 주님, 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야곱의 우물』 《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12월 29일자 《새터 교회》 박 후임 목사님의 글입니다. *^^* </b> <br> <EMBED src=http://myhome.naver.com/pinokeeo1004/1/angel71.swf width=150 height=10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b>【 묵 상 나 누 기 】</b></ul> <pre><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 시므온 †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2pt"> <b>시므온!.<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시므온. 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박 목사님처럼 [안나]도 시므온을 할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묵상 글을 통해서 시므온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참 감사드립니다.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45928;던' 사람, '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한 줄 한 줄 곱씹어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인지..느껴집니다.. 숨이 멈추는듯 눈길을 뗄 수 없는 귀절이 있습니다. <FONT color=red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그는 존재의 이유가 바로 '구원을 보는 것'이었다. 구원을 보는 것,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그러면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때문에 살고있는가. 끝없이 꼬리에 꼬리가 이어집니다. 무엇때문에 살아 가고 있는가! 앗! 나도 시므온처럼 '구원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서 숨이 끊어지는 날에 시므온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FONT color=000086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 생각과 내 경험이 언제나 앞서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한 치 뒤로 물러서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요. 양보가 안됩니다. <br>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고집스러워갑니다. 나이 핑게되면서 말입니다. <b>'아니면 아니다.'</b>라고 말하면서 내 생각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털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br> 불의한 것을 보면서도 눈을 감아야합니다. 내 시간과 내 물질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경건하게 살아야 되는데.../조금만, 아주아주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이 있으면 기도하기를 쉬어버립니다. <br> 성령님이 내 안에 머무르시도록 내 성전을 깨끗이 치워 놓아야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내 안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기에는 분함과, 섭섭함, 그리고 너그럽지 못함들이 아직도 그득합니다. <br> 2004년 12월의 끝자락에서 마음에 닿는 詩 한 편을 야곱이 홈피에서 읽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ul><FONT color=000086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오늘 아침 저에게 배달된 시 입니다 시와 함께 시 해설까지 ....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시인의 한마디가 겨울에 맨몸으로 나서게 합니다 <FONT color=000086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3pt"> <b>▶ 부드러운 칼 - 정호승 詩 ◀</b> <FONT color=000086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br>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br>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br>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br>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br>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br>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b>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b>정호승</b>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짧은 시간 동안』외 간행.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FONT color=black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2pt"> <b>《해설》</b> <FONT color=black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칼 권하는 사회다. 신문을 읽다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거리의 노숙자를 내려다보다가, 응급실 촌로의 &#44473;한 눈망울을 바라보다가, 직장 상사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불쑥불쑥 권하는 칼 한 자루. <br> 평생 나를 이끌고 온 욕망의 칼, 격정의 칼, 분노의 칼.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내 모든 생의 그런 아픔을 다시는 헤엄쳐 돌아올 수 없는 갈대숲 너머로 던져버린다. <br> 좌절과 패배와 방관이 아니다. 더욱 날 사나운 비장의 무기를 챙기기 위해서다. 그것은 눈부신 햇살에 자꾸 자꾸 부드러워지는 희망과 미소의 비수. <br> 한번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두 번 읽으면 그 뜻이 헤아려지고 세 번 읽으면 내 것이 되어버리는 시. 그게 정호승의 시다. <br> 지난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누군가를 향한 칼을 갈고 있었다면 오늘 아침 그 칼을 한번 버려보자. <br> 칼을 버린다고 칼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잠시 빼앗긴 욕망의 집에서 칼을 놓아주고 먼 훗날까지 반짝반짝 빛날 나를 찾는 것이다.</b></ul>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IMG src="http://mailimg.hanmail.net/hm/emo/obj_28.gif"> <br> 성령님을 내 성전 안에 모시려니 칼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성령이 머물러' 계셨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시므온!</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면 내 마음이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깨끗 해야 하는데/내 안에 이런저런 칼들로 인하여 성령께서 머무실수가 없으니.../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평탄하지가 않습니까... ㅠ.ㅠ 시므온 처럼 내 존재의 이유도 '구원을 보는 것'이어야 하기에... <FONT color=brown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b>한번 읽으니 내 모습이 보이더니 두 번 읽으니 그 뜻이 헤아려지고 세 번 읽어서 내 것이 되어버린 詩. 정호승 님의 『부드러운 칼』이라는 詩.</b>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1pt"> 고운 詩와 함께 칼들을 내던지며 2004년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고 싶어서 입니다...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서 입니다. <br> 놓아야 될 끈들은 스르르 내려놓겠습니다. 칼도 집어 던지렵니다. 순간순간 깨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먼저는 내 자신에게 간절히 외치며 묵상을 나누는... <FONT color=#005e77 face=돋음체 style="FONT-SIZE: 10pt"> 그래서 요즘따라 밥을 많이 먹는... <IMG src="http://home.naver.com/wlsrhkgns/A/jsl/icon/28.gif"> <b>뚱녀 [안나]가요*^^*</b> <EMBED src=http://music.cein.or.kr/technote/./board/dongkam/upfile/슈베르트의_그대는_나의_안식.ASF autostart+"true" loop="-1" hidden="true"></EMB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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