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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감사합니다! (성탄 8일축제 내 제 7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30 조회수851 추천수7 반대(0) 신고
 

                      감사합니다! (성탄 8일축제 내 제 7일)

 

  이번 주 마르코니네트(가톨릭 아마추어무선사회 정기교신)의 교신주제는 송구영신이었는데, 이번 교신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주간에 가진 교신이라 그런지 많은 분들이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주로 오고간 이야기는 바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금년이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해인지라 ‘이렇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는 분도 계셨고, 금년 한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정기교신에 개근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분등 각자 감사의 이유가 다양했습니다. 저역시 ‘병원사목이란 새로운 사도직과 삶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1, 1- 18)에서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고 요한 복음사가가 증언한 것처럼 저도 금년 한해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과 그 생명의 빛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진정으로 주님과 이웃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께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1데살 5, 18)고 하신 말씀과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라고 하신 박상대신부님의 말씀을 내년 한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금년 한해 부족한 저의 묵상글을 늘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참고로 박상대신부님의 강론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짜’와도 같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당한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자세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습관은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는 “감사합니다.” 하고 자주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인색한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는 지나가는 개도 다 안다. 다소 표면적이긴 하지만, 상점을 드나들 때나 전시회를 들어설 때 한결같은 안내원들의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라는 인사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는 우리들이 아닌가? 하루 종일 시커먼 매연을 마셔가며 고속도로나 유료도로 톨게이트에서 “반갑습니다. 안전운행 하십시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는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라는 단 두 마디의 말도 못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들이 직업상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들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무뚝뚝하게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건네 오는 인사에 한 마디 감사의 응답을 즉각 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족한 습관을 탓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나병의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곳, 즉 회당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고쳐준 예수께로 돌아왔다. 그렇다. 근본적으로 감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살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은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 여기에 오늘 예수께서 좀더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가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가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유의 요지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만한 재판관이 억울함을 당한 과부의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목적은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거만한 재판관이 수락했다’는 데 있다기보다 기도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 복음이 인자(人子)의 재림(再臨)에 관한 대목(17,20-37) 바로 다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기도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종말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종말을 대비한 유비무환은 한 가지 일에만 감사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늘 감사하며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도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11,1-4)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5-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 감사할 줄 모르고 거만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늘 감사하며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감사와 기도뿐이다. 예수께서도 항상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로도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도하기를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마태 11, 25; 14, 19; 15, 36; 26, 27; 마르 6, 41; 8, 6; 14, 23; 루가 9, 16; 10, 21; 22, 19; 24 ,30; 요한 6, 23; 11, 41; 사도 27, 35; 로마 1, 8; 1고린 11, 24-25; 14, 16-18; 2고린 9, 15; 에페 1, 16; 5, 20; 필립 1, 3; 4, 6; 골로 1, 3; 3, 17; 4 ,2; 1데살 5, 18; 1디모 2, 1; 2디모 3, 2; 필레 1, 4; 묵시 7, 12; 11, 17 등)  ‘감사와 기도는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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