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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전에도 지금도 내일도 계시는 하느님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31 조회수1,351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12월31일(금) - 성탄 팔일축제 내 제7일


[오늘의 복음]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분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16)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8)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복음산책]  전에도 지금도 내일도 계시는 하느님


  주님성탄 팔일축제 7일째이자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오늘 미사의 복음으로는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가 봉독된다. 우리는 이미 성탄대축일 낮미사에 이 복음을 들은 바 있다. 요한복음의 심오한 가르침과 사변적인 신학은 어렵기로 정평(定評)이 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단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제4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은 요한 스스로가 에필로그(맺음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 복음서는 저마다 나자렛 예수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피력하고 또 증명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선포된 진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리스도론’을 정립한다. 좀 어려운 말을 쓰자면,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을 토대로 나자렛 예수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도달하는 ‘상향(上向) 그리스도론’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서 나자렛 예수로 향하는 ‘하향(下向) 그리스도론’을 논한다. 상향 그리스도론에서 출발점은 나자렛 예수의 유년시절과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공생활이며, 하향 그리스도론의 관점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탄생사건이다. 이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동일화(同一化)하는 작업을 놓고 아래에서 출발하는 관점과 위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더러는 아래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함축적인 그리스도론’, 위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현현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론을 논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양방향의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론에 기여하는 점은 그리스도론의 또 다른 하나의 분야인 ‘선재(先在) 그리스도론’이다. 다른 말로는 ‘전실존적(前實存的) 그리스도론’이라고도 한다. 공관복음서가 고백하는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신학적 해제(解題)가 천지창조 이전의 시점에서도 거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재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갈라 4,4)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성자(聖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으로서 성자에게 붙여진 전인격적인 호칭이다. 성자이신 말씀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1절)는 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같은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창세기의 ‘한 처음’(1,1)은 시간상 모든 시작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요한복음 프롤로그의 ‘한 처음’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뜻한다. 그 이유는 시간(時間) 또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세 1,3)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존재하며 시간이 있기 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밖에 없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고, 생겨난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그 존재와 생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육(肉)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이며, 예수성탄의 심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으로서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신다.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시간을 창조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 이유 주신 말씀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함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멈추는 법이 없지만 우리들 사람이 그 시간을 어제, 오늘, 내일로 나누어 쓰기 때문에 한해를 마감하는 이 시간,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귀한 시간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못내 아쉽다. 많은 사람들이 찬미와 감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려 하기 보다는 억울함과 불만으로 접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기에 희망을 갖는다. 전국의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쓰는 교수들이 매년 한국의 정치를 결산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뽑았다. 2001년에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을, 2002년에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을, 2003에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을, 2004년 올해에는 “같은 무리와는 똘똘 뭉치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을 가진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손꼽았다고 한다.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표현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도 많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왜 우리나라의 정치는 이 모양일까? 우리나라 전체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 비율이 약 9%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많은 신자들이 정치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치하는 것과 믿는 것이 그렇게도 다른 것인가?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인정한 다음해 314년 교황에 등극하여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비해야 할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었던 성 실베스터 1세 교황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을 수 있는 새해를 기원해 본다.◆[그동안 복음산책을 사랑해 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만5년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겸 교수로서의 생활을 마치고 새해부터는 다른 임무를 맡게 되어 매일 글을 올리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건이 허락될 때까지는 애독자로 남겠습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께 주님과 함께하는 새해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박상대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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